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AD 262~284) 2년 : 기원후 263년
▶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다 : 263년 01월(음)
- 二年, 春正月, 拜伊湌良夫爲舒弗邯, 兼知内外兵馬事.
- 2년(263) 봄 정월에 이찬(伊湌)[1] 양부(良夫)[2]를 서불한(舒弗邯)[3]에 임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4]
▶ 국조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면을 베풀고 선친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다 : 263년 02월(음)
- 二月, 親祀國祖廟, 大赦. 封考仇道爲葛文王.
- 〔2년(263)〕 2월에 왕이 직접 국조묘(國祖廟)[5]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考] 구도(仇道)[6]를 갈문왕(葛文王)[7]으로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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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찬(伊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2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척찬에 대한 주석 참조.
- 양부(良夫) : 본서 권2 신라본기2 첨해이사금 3년(249) 7월조에 남당의 설치와 함께 이찬에 임명되었다가, 이때 서불한에 임명되어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 서불한(舒弗邯)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다. 이벌찬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 중앙과 … 하였다 : 신라 초기에 제1, 2관등인 서불한(舒弗邯)·이벌찬(伊伐湌), 이찬(伊湌)의 임명 기사에 그들에게 군사와 국정운영을 맡겼다는 표현이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본 기사와 같이 군사만 맡았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 당시 이들이 책임을 맡았던 군사와 국정이 엄격히 구분되는 업무 분야는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이찬 등이 관직이 아니므로, 군사와 국정이 이찬 등의 고정적인 직무라 하기는 힘들고, 아직 관직과 관등이 분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직위의 역할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국조묘(國祖廟) : 시조묘라 생각된다. 시조묘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3년(6) 정월조의 시조묘에 대한 주석 참조.
- 구도(仇道) : 아달라이사금대와 벌휴이사금대에 활동한 생몰년 미상의 인물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부친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19년(172) 정월조의 구도에 대한 주석 참조.
- 갈문왕(葛文王) : 갈문왕(葛文王)은 신라 왕호의 일종으로, 6세기 초 신라 금석문들에서 매금왕(寐錦王)이라 칭해지는 왕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지위이지만 동시에 왕에 준하는 특수한 지위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년(148)조 기사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