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8일 월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대 첨해이사금(AD 247~261) 1년 : 기원후 247년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247~261) 1: 기원후 247

 

첨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24705()

 

  •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1]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까지 같은 조분왕(助賁王)[2]의 동생이다.

 

시조묘를 배알하고 생부 골정을 갈문왕으로 책봉하다 : 24707()

 

  •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 원년(247) 가을 7월에 왕이 시조묘(始祖廟)[3]에 찾아가 뵈었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4]으로 책봉하였다.

 

갈문왕 책봉에 대한 사론

 

  • 論曰. 漢宣帝即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謚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 亦有之. 此非禮, 固不可以爲法也.
  • 논하여 말한다.[5] () 선제(宣帝)[6]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기를, “남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의부모보다 격을낮추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조상을 모시는 법도입니다. 이에 황제의 생부를 친()이라 하고 그 시호는 도()라 하며, 생모는 도후(悼后)라 하면서 제후왕의 예와 같이 해야 합니다.”[7]라고 하였다. 이것이 경전의 뜻에 맞는 것으로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8]와 송() 영종(英宗)[9]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따랐다.[10] 신라도 친자식이 아닌왕의 친족이 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아버지를 왕으로 추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만이 아니라, 그 장인을 왕으로책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결코 따라야 할 법도로 삼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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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 생몰년은 미상~261년이며, 247~261년까지 재위한 신라 제12대 왕이다. 계보상 성은 석()이나 이 당시 성을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1 왕력제1에는 첨해를 이해(理解)’라 적고 있는데 의 오기임이 분명하다. 같은 책 세주에서는 詀解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첨해이사금은 전왕인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아버지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은 제9대 왕인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아들이어서 벌휴의 손자가 되며, 10대 왕인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과는 사촌 관계가 된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이며, 배우자가 누구인지는 전하지 않는다. 형제로는 형인 전왕 조분이사금과 누이 나해이사금 왕후가 있다.
  2. 조분왕(助賁王) : 신라 제11대 왕 조분이사금으로, 왕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즉위년(230)의 조분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3. 시조묘(始祖廟) : 신라에 있었던 사당으로, 국가 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3(6) 정월조의 시조묘에 대한 주석 참조.
  4.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 : 본명은 골정(骨正)[홀쟁(忽爭)]으로 골정갈문왕이라고도 한다. 신라 제9대 왕 벌휴이사금의 장남이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동생 이매(伊買)의 아들인 나해이사금이 제1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후에 그의 두 아들인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이 11대와 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세신갈문왕의 배우자는 구도갈문왕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이다.
  5. 논하여 말한다 : 이 사론은 신라가 왕의 직계 조상 이외의 인물들을 갈문왕으로 추봉한 것을 비판한 것으로, 김부식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판은 갈문왕을 후대에 왕에 의해 추봉된 왕으로 이해한 본서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148)조의 갈문왕에 대한 세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갈문왕을 후대에 추봉한 왕이라는 것은 사실과 달라 문제가 있다.
  6. () 선제(宣帝) : ()의 제10대 황제로 무제(武帝)의 증손자이다. 생몰년은 B.C 91~B.C. 49년이고, 재위년은 B.C. 73~B.C. 49년이다. B.C. 74년 소제(昭帝)가 사망하자 폐제(廢帝) 창읍왕(昌邑王)이 잠시 황제가 되었다가 곧 폐위되고, 선제가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여 25년간 통치하였다.
  7. 남의 합니다 : 한서(漢書)63 열전56 하무전(何武傳)자치통감(資治通鑑)24 선제기 본시 원년(B.C.73) 6월조에 있다.
  8.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 왕망(王莽)의 신()을 무너뜨리고 한()을 부흥한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로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재위년은 25~57년이다. 한 고조 유방의 9세손으로 본명은 유수(劉秀)이다.
  9. () 영종(英宗) : 북송의 제5대 황제로 생몰년은 1032~1067년이며, 재위년은 1063~1067년이다. 본명은 조서(趙曙)이며, 송 태종(太宗)의 손자 복왕(濮王) 조윤양(趙允讓)13번째 아들이다. 전황제인 송 인종(仁宗)5촌 조카인데, 어린 시절 인종의 양자가 되어 황위계승자로 지목되기도 하였으며, 1062년 황태자가 되고 그 다음해 인종이 사망하자 황위에 올랐다. 병으로 인해 재위 5년 만에 사망하였다.
  10. 본받아 따랐다 : 자신의 친부모를 추봉하여 종묘(宗廟)에 올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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