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11대 국왕] 원제 유석(元帝 劉奭, BC 48~33)
- 재위 : 기원전 48년 ~ 기원전 33년
- 출생일 : 기원전 76년
- 사망일 : 기원전 33년
[원제의 연호]
- 초원(初元, 기원전 48년 ~ 기원전 44년)
- 영광(永光, 기원전 43년 ~ 기원전 39년)
- 건소(建昭, 기원전 38년 ~ 기원전 34년)
- 경녕(竟寧, 기원전 33년)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은 선제의 장남이며 공애황후의 소생이다.
[선제, 황태자 폐위를 고려하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제와 달리 유교를 중시한 정책을 실시했다. 선제는 황태자가 죽은 애첩인 사마씨(司馬氏)를 그리워해 한탄하고, 슬퍼하고, 이상주의적인 유교에 심취하는 등 너무나 서정적인 성격이어서, 장래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가져 한때는 황태자의 폐위도 검토했다. 그러나, 조강지처인 허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선제의 생각이나, 생모의 사촌동생인 평은후 허가와 계모 왕황후에 의해, 왕씨(왕황후=왕정군)와의 사이에 태어난 성제를 이유로 폐립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환관에 의해 좌우되는 치세]
즉위 직후에 학사인 소망지(蕭望之) 등 유생을 등용했지만, 이들이 선제 때부터 측근으로서 중용되고 있던 환관인 홍공(弘恭), 석현(石顯)과 대립해 실각한 뒤로는 환관 중심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이후 원제의 치세는 환관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었다.
[재정의 건전화를 도모하지만 역부족]
원제는 원정을 앞에 두고, 세금을 경감해, 어려운 형법을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채용하여, 민중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 외 원제는 대규모 연회를 금지, 수렵용의 별장이나 황실 소유지의 경비를 억제하여 종묘 등 제사에 걸리는 경비를 삭감하고 재정의 건전화를 도모했지만,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 이르지 않았다.
그 한편으로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근거하는 정책도 실시되어 전매제를 폐지해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시켰다. 선제에 의해 중흥 된 국세는 다시 쇠약해져 원제의 황후 왕씨 일족으로부터 나온 왕망의 찬탈의 요인을 만들어 냈다. 후한의 역사가 반표(班彪)는 그 치세를 「우유부단으로 하여 선제의 업적 쇠약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가족관계]
- 황후 : 효원황후 왕씨(孝元皇后 王氏)
장남 : 효성황제 유오
장녀 : 양아공주 - 후궁 : 소의 부씨(昭儀 傅氏)
차남 : 정도공왕 유강
자부 : 정희(丁姬)
- 손자 : 효애황제 유흔
차녀 : 평도공주 - 후궁 : 소의 풍씨(昭儀 馮氏)
3남 : 중산효왕 유흥
- 손자 : 효평황제 유간 - 후궁 : 첩여 위씨(婕妤 衛氏)
3녀 : 평양공주(平陽公主) - 후궁 : 미인 동씨(美人 董氏)
4남 : 미상 - 후궁 : 양제 사마씨(良娣 司馬氏)
- 후궁 : 왕소군
- 후궁 : 미상
4녀 : 영읍공주 (潁邑公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