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AD 196~230) 1년 : 기원후 196년
▶ 나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196년 04월(음)
- 奈解尼師今立. 伐休王之孫也. 母内禮夫人. 妃昔氏, 助賁王之妹. 容儀雄偉, 有俊才. 前王太子骨正及第二十[정덕본·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子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子를 따랐다.]伊買先死, 大孫尚㓜少, 乃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師今. 是年, 自正月至四月不雨, 及王即位之日大雨, 百姓歡慶.
-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1]이 왕위에 올랐다. 벌휴왕(伐休王)[2]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3]이다. 왕비 석씨(昔氏)는 조분왕(助賁王)[4]의 여동생이다. 외모가 웅장하고 훌륭하며 재주가 뛰어났다. 전왕의 태자[5] 골정(骨正)[6]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7]가 먼저 죽었고 태손(太孫)[8]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매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바로 나해이사금이다.[9] 이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는데, 왕이 즉위하는 날에 이르러 큰비가 내리자 백성들이 기뻐하며 경사스럽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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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 내해이사금이라고도 한다. 생몰년은 미상~230년이며, 196∼230년까지 재위한 신라 제10대 왕이다. 성이 석(昔) 이름이 나해(奈解)이지만, 당시 실제 부계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왕호는 이사금이다. 가족 관계를 보면 아버지는 전왕인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이고,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다. 배우자는 큰아버지인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의 딸이다. 따라서 제11대, 12대 왕인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과는 사촌이면서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자녀는 아들 석우로(昔于老)와 이음(利音)이 있고, 딸 아이혜(阿爾兮)는 조분이사금의 왕비가 된다. 나해와 조분은 사위·장인 관계도 되는 것이다. 석우로의 아들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 제16대 왕으로 즉위하기도 했는데, 너무 시간 격차가 커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선석열, 2015,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 57~58쪽). 그의 재위기간에는 백제와 왜와의 분쟁이 심했으며, 가야와 교류하였다.
- 벌휴왕(伐休王) : 신라 제9대 왕 벌휴이사금으로, 왕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즉위년(184)조 참조.
- 내례부인(內禮夫人) : 내례부인은 아달라이사금의 왕비 이름으로도 나오고, 또 본서 벌휴이사금 즉위년(184)조에 벌휴이사금의 어머니 이름이 약간 다른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준다. 아달라이사금의 왕비와 벌휴이사금의 어머니는 이름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성이 박씨와 김씨로 다르게 되어 있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에서 나해이사금의 모친으로 나오는 내례부인은 아달라이사금 왕비와 완전히 같은 이름이다. 둘이 동일인이라면 아달라이사금 왕비가 다음 왕인 벌휴이사금의 둘째 아들 이매(伊買)와 재혼했던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는 그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고 동명이인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 조분왕(助賁王) : 신라 제11대 왕 조분이사금으로, 왕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즉위년(230)의 조분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 태자 : 왕의 장남이나 왕위계승권자를 이른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즉위년(24)조의 주석 참조.
- 골정(骨正) :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의 본명으로, 홀쟁(忽爭)으로 쓰기도 한다. 세신갈문왕의 생몰년은 미상이며, 벌휴이사금의 장남이다. 배우자는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金氏)이고, 그와의 사이에서 제11대 왕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과 제12대 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을 두었다. 딸도 있었는데 나해이사금의 왕비가 된다. 부왕인 벌휴이사금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첨해이사금 즉위년(247) 7월에 세신갈문왕에 추봉되었다.
- 이매(伊買) : 벌휴이사금의 둘째 아들로, 형인 세신갈문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벌휴이사금 사후 형의 자식들인 조분과 첨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나해이사금이 먼저 즉위하였다. 배우자는 내례부인이라고 전한다.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 태손(太孫) : 태손은 왕위 계승권자인 현왕의 손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원래 단어는 대손(大孫), 곧 장남[大子, 太子]의 장남을 이른 것이었지만, 장남의 왕위계승이 일반화되면서 태자와 마찬가지로 한 세대를 건너뛴 왕위계승권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당시 신라에서 태자제도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므로, 이 태손은 후대의 용어가 부회된 것이거나, 장남의 장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참고문헌〉金昌謙, 1993, 「新羅時代 太子制度의 性格」, 『韓國上古史學報』 13김병곤, 2011, 「신라의 태자 책봉제 수용 과정 고찰」, 『韓國古代史硏究』 64
- 전왕의 … 나해이사금이다 : 벌휴이사금이 사망할 때, 두 아들이 모두 사망한 상태였고, 큰 아들 세신갈문왕의 두 아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둘째인 이매의 아들 나해이사금이 즉위하였다고 본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벌휴이사금의 큰 아들 세신갈문왕의 두 아들이 연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이러한 왕위 계승을 통해 나해와 조분은 같은 벌휴계이지만, 직계를 기준으로 분화된 왕계를 형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선석열, 2015,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 55~64쪽). 이러한 입장을 따르면 나해이사금이 이매계로 즉위할 수 있었으나, 곧 골정, 곧 세신계가 왕위를 차지하였고, 석우로 같은 이매계는 밀려났다가 이후 16대 흘해이사금대에 다시 왕위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