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7년 : 기원후 566년
▶ 기원사와 실제사가 완공되다 : 566년 02월(음)
- 二十[정덕본에는 一, 을해목활자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다.]七年, 春二月, 祗[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祗로 되어 있다. 인도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祇로 표기함이 옳다. 주자본에는 祗로 되어 있다.]園·實際二寺成.
- 27년(566) 봄 2월에 기원사(祇園寺)[1]와 실제사(實際寺)[2]가 완공되었다.
▶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 566년 (음)
- 立王子銅輪爲王太子.
- 〔27년(566)〕 왕자 동륜(銅輪)[3]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4]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 566년 (음)
- 遣使於陳, 貢方物.
- 〔27년(566)〕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5]
▶ 황룡사가 완공되다 : 566년 (음)
- 皇龍寺畢功.
- 〔27년(566)〕 황룡사(皇龍寺)가 완공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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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기원사(祇園寺) : 기원사는 B.C. 6~5세기경 중인도 마갈타국 파사닉 왕의 태자인 기타(祇陀)의 동산[祇園]에 지었다는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서 권제47 열전제7 열기조에 7세기 후반에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북 보은) 태수(太守)를 역임한 열기(裂起)와 친분이 있었던 순경(順憬)이 기원사의 승려였다고 전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하 경애왕 정해(丁亥: 경애왕 4년, 927) 11월조에서 소개한 ‘포석정주악사(鮑石亭奏樂詞)’라는 시에 따르면, 기원사는 실제사(實際寺)와 함께 포석정 서쪽에 위치했다[祇園實際兮二寺東]고 한다. 이를 근거로 기원사는 포석정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박방룡, 140쪽). 종래에 이와 같은 위치 비정을 바탕으로 기원사를 박씨 왕실의 추복(追福) 사찰로 파악하기도 하였다(李道學).〈참고문헌〉李道學, 1999, 「古新羅期 鎭護寺刹의 機能 擴大 過程」, 『白山學報』 52박방룡, 2013, 『신라도성』, 학연문화사
- 실제사(實際寺) : 본서 권제47 열전제7 취도조에 태종무열왕 2년(655)에 백제가 침공하자, 실제사의 승려였던 도옥(道玉)이 취도(驟徒)로 개명한 다음, 삼천당(三千幢)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삼국유사』 권제5 피은제8 영여사조에 경덕왕이 국사(國師)로 추봉(追封)한 영여(迎如)라는 승려가 실제사에 머물렀으며, 이로 인하여 일연(一然)이 살았던 고려 후기에 실제사를 국사방(國師房)이라고 별칭하였다고 전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하 경애왕 정해(丁亥: 경애왕 4년, 927) 11월조에서 소개한 ‘포석정주악사(鮑石亭奏樂詞)’라는 시에 따르면, 실제사는 기원사(祇園寺)와 함께 포석정 서쪽에 위치했다[祇園實際兮二寺東]고 한다. 이를 근거로 실제사는 포석정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박방룡, 2013, 『신라도성』, 학연문화사, 140쪽).
- 동륜(銅輪) : 제24대 진흥왕의 맏아들이자 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6대 진평왕조에서는 동륜을 또한 동륜(東輪)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진흥왕 27년(566)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진흥왕 33년(572) 3월에 사망하였다.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사륜(舍輪)이라고 지었다. 사륜은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전하는데, 이것은 철륜(鐵輪)을 이른다. 동륜과 철륜은 모두 전륜성왕설화(轉輪聖王說話)에서 따온 이름이다. 인도의 전륜성왕설화에 의하면, 전륜성왕은 자신이 소유한 수레바퀴를 굴려서 천하를 정복하고, 히말라야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모든 영토의 왕들을 위엄과 덕으로 복종시킨다는 성스러운 왕이라고 한다. 전륜성왕은 인도의 불교 중흥에 힘쓴 아소카왕을 모델로 하여 만든 정법(正法), 즉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제왕을 이르는 말이다. 전륜성왕에는 금륜왕(金輪王), 은륜왕(銀輪王), 동륜왕(銅輪王), 철륜왕(鐵輪王)이 있는데, 진흥왕이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 사륜(철륜)이라고 지은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은 금륜왕 또는 은륜왕을 자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金哲埈, 1952; 1990, 148쪽; 南東信; 김기흥, 158~159쪽). 한편 일부 학자는 동륜과 사륜 등은 4전륜성왕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히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불전(佛典)에 나오는 인명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辛鍾遠, 273쪽).〈참고문헌〉金哲埈, 1952,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下)」, 『歷史學報』 2; 1990,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재수록南東信, 1992, 「慈藏의 佛敎思想과 佛敎治國策」 『韓國史硏究』 76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김기흥, 2000,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 왕자 동륜(銅輪)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 종래에 진흥왕이 북제(北齊)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적인 책봉(冊封) 예제(禮制)의 정치적 의미를 체득한 후에 왕위계승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태자책봉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였다고 본 견해가 제기되었다(김병곤, 2011, 「신라의 태자책봉제 수용과정 고찰」, 『韓國古代史硏究』 64).
-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 중국 사서에서 진흥왕 7년(566)에 신라가 진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 황룡사(皇龍寺)가 완공되었다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법운전(法雲傳)에 진흥왕 27년(566)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육조에서는 황룡사를 기축년(己丑年: 569)에 주위의 담을 쌓고 17년 만에 겨우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본서와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사찰의 완공 시점이 다르게 전하는데, 전자에서는 중요한 시설들이 갖춘 것을 기준으로, 후자에서는 건물 둘레에 담장까지 둘러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을 기준으로 완공 시점을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李基白, 1986, 「皇龍寺와 그 創建」,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