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 금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6년 : 기원후 565년

 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6: 기원후 565

 

북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신라왕으로 삼다 : 56502()

 

  •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 26(565) 2월에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1]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2] 동이교위(東夷校尉)[3] 낙랑군공(樂浪郡公)[4]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5]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 56508()

 

  • 秋八月, 命阿湌春賦出守國原.
     
  • 26(565)가을 8월에 아찬(阿飡) 춘부(春賦)[6]에게 명하여 국원(國原)으로 나가서 지키게 하였다.[7]

 

대야주를 설치하다 : 56509()

 

  • 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 26(565)9월에 완산주(完山州)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8]를 설치하였다.[9]

 

진나라에서 불경을 보내다 : 565()

 

  • 陳遣使劉思與僧明觀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 26(565)()나라[10]에서 사신(使臣) 유사(劉思)[11]와 승려 명관(明觀)[12]을 보내 예방(禮訪)하고, 불교 경론(經論)[13]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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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무성황제(武成皇帝) : 북제(北齊)의 제4대 황제로 이름은 고담(高湛)이고, 시호(諡號)는 무성(武成)이며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효소제(孝昭帝)의 유명(遺命)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562년에서 565년까지 4년 동안 재위하다가 태자 위()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다.
  2. 사지절(使持節) : 중국 고대 장군이 소지하는 부절(符節), 즉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사지절을 부여받은 장군은 자신이 거느리는 관리 가운데 질()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자의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3. 동이교위(東夷校尉) : 동이교위는 한()나라에서 설치한 이래, 서진(西晉) 때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운용된 직책이며, 보통 중국 동북부의 세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북위(北魏) 때에 조정에서 파견한 동이교위(東夷校尉)와 고구려왕의 책봉호로서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이 존재했고, 이후 안장왕(安臧王)이 산관(散官)인 동이교위를 책봉받은 이후, 565년까지 고구려왕만이 동이교위를 책봉받았다(윤용구). 그런데 일반적으로 북위에서 고구려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동이(東夷) 세계에서 고구려의 우위를 공인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되자, 북제가 565년에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를 동이 세계를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하면서 신라왕에게 동이교위를 책봉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상우).
    참고문헌
    윤용구, 2005, 고대중국의 東夷觀과 고구려: 東夷校尉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55
    전상우, 2018,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외정책 변화와 新羅 阿旦城 공격, 韓國古代史硏究89
  4. 낙랑군공(樂浪郡公) : 진흥왕이 처음으로 낙랑군공을 책봉받은 이후 중국 왕조에서 신라왕에게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5.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 북제서(北齊書)7 제기(帝紀)7 하청(河清) 4(565) 2월 갑인(甲寅)조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라고 전하며, 동일한 내용은 북사(北史)8 제본기하(齊本紀下)8 하청 42월조에도 전한다. 한편 책부원귀(冊府元龜)963 외신부(外臣部) 봉책(冊封)조에는 무성(武成) 하청 42월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동이교위와 영동교위는 동일한 관작으로 보인다.
    북제서의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대외적으로 김씨(金氏) ()을 칭했을 뿐만 아니라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진흥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당대에 진흥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6. 춘부(春賦) : 진흥왕 26(565) 8월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의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사신(仕臣))에 임명된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7. 아찬(阿飡)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나가 국원(國原)을 지키게 하였다 :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 외관조에 사신(仕臣)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부르며, 진흥왕 25(564)에 처음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564년에 처음으로 소경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사대등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해 8월에 아찬 춘부를 국원소경의 사대등(사신)으로 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8. 대야주(大耶州) : 오늘날 경남 합천군 합천읍에 해당한다.
  9. 완산주(完山州)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6(555) 정월조의 완산주 설치에 대한 각주를 참고한다면, 본 기록은 비사벌에 주둔한 정군단을 대야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중고기에 정군단의 이치(移置)는 주치(州治)의 이치를 의미하고, 비사벌과 대아지역 모두 하주(下州)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이해되고 있으므로, 본 기록은 하주의 주치가 비사벌에서 대야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0. ()나라 :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南朝)의 하나이다. 557년에 진패선(陳覇先: 무제(武帝), 재위 557559)이 양()나라를 멸하고 건국하여 건강(健康: 지금의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진()이라고 하였다. 진나라는 589년에 수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11. 유사(劉思) : 진흥왕 26(565)에 남조의 진()나라에서 신라에 보낸 사신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2. 명관(明觀)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2 각덕전(覺德傳)진흥왕26(565)에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입학승(入學僧) 명관을 파견하여, 불교의 경론을 무려 2,700여 권이나 보내주었다. 초기에 신라가 불법(佛法)의 교화를 처음으로 펼칠 때는 경전과 불상이 많이 부족하였는데, 이때 이르러서 모든 것을 다 갖추게 되었다.”라고 전한다. 본 기록과 해동고승전을 종합하면, 명관은 불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565년 정월에 진나라에서 보낸 사신 유사와 함께 신라에 귀국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명관은 각덕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에 유학한 신라 승려로 이해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행적을 알 수 없다.
  13. 경론(經論) : 부처가 설법한 것을 기록한 책이 ()’이고, 그것을 자세하게 해석한 고승들의 저술을 논()이라 한다.
  14. ()나라에서 불교 경론(經論)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천가(天嘉) 6(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가 승려 명관과 함께 내경(內經: 불경)을 받들고 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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