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3년 : 기원후 562년
▶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다 : 562년 07월(음)
-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 23년(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여 민호(民戶)를 약탈하자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았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1]
▶ 가야를 토벌하다 : 562년 09월(음)
-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 先馳入栴檀門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삼국사기》 권44 사다함전(斯多含傳) 및 《삼국사절요》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百口.[정덕본에는 판독 불능, 을해목활자본에는 百口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百口로 되어 있다.]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 〔23년(562)〕 9월에 가야(加耶)[2]가 배반하였으므로[3] 왕이 명하여 이사부(異斯夫)[4]에게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5]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6]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栴檀門)[7]으로 달려 들어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8] 전공(戰功)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땅[良田]과 사로잡은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이에 받은 노비[生口]는 풀어주어 양인(良人)으로 삼고, 토지는 나누어서 군사들에게 주었다.[9]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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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여 … 1천여 명이었다 : 본서 권제27 위덕왕 8년(561) 가을 7월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다만 백제본기 기록의 기년은 561년으로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 가야(加耶) : 경북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大加耶)를 말한다.
- 가야(加耶)가 배반하였으므로 : 종래에 ‘가야가 배반하였다[加耶叛]’는 것에 대해 대가야를 532년에 멸망한 금관국으로 오인한 『삼국사기』 찬자의 가필로 파악하는 견해(李丙燾, 59쪽; 김태식), 실제로 대가야가 앞서 멸망하였고, 562년에 대가야의 잔여세력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林炳泰; 朱甫暾)가 제기되었다. 이외에 이것을 신라인이 단지 대가야를 치기 위한 명분으로 든 것이라고 보는 견해(李熙眞), 우륵의 망명을 전후한 시기에 대가야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신라의 부용세력으로 전락하였다가 562년에 다시 신라에 반기를 든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영호; 신가영), 가야는 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야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한 다음, 이전 금관국 등이 신라에 병합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인식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백승충) 등도 제기되었다.〈참고문헌〉林炳泰, 1967,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合朱甫暾, 1982,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新羅의 膨脹과 關聯하여 」, 『慶北史學』 4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金泰植, 1992, 「6세기 중엽 加耶의 멸망에 대한 연구」, 『韓國古代史論叢 4』, 駕洛國事蹟開發硏究院李熙眞, 1994, 「加耶의 消滅過程을 통해 본 加耶·百濟·新羅關係」, 『歷史學報』 141이영호, 2006, 「于勒 12曲을 통하여 본 大加耶의 政治體制」,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신가영, 2013,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加耶叛’기사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72백승충, 2016, 「‘加耶叛’ 기사의 재검토」, 『한국민족문화』 61
- 이사부(異斯夫) : 이사부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6년(505) 2월조 참조.
- 사다함(斯多含) : 진흥왕 23년(562) 대가야 정복에 공을 세운 신라의 화랑(花郞)이다.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奈密王: 나물왕) 7대손이고, 아버지는 급찬(級飡) 구리지(仇梨知)이다. 화랑으로 천거되어 낭도(郎徒) 1천 명을 거느렸으며, 15~16세인 진흥왕 23년에 대가야 정벌에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사우(死友)가 되기로 약속한 무관랑(武官郎)이 병으로 죽자, 7일 동안 슬피 울다가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17세였다. 사다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 참조.
- 사다함(斯多含)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는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자, 사다함이 종군(從軍)하기를 청하니, 그를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는데, 낭도의 무리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전한다. 참고로 귀당은 진흥왕 23년(562) 이전에 6부 지배층의 자제들을 소모(召募)하여 창설한 군단으로서 왕궁과 더불어 왕경 전체의 수비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18, 「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 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 132).
- 전단문(栴檀門) :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서는 ‘전단량(旃檀梁)’이라고 하면서, 세주(細注)로 가라(加羅) 말로 ‘양(梁)’은 ‘문(門)’을 이른다고 밝혔다. 전단문은 대가야 왕성의 문 이름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전단(栴檀)은 자단, 백단 등의 향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562) 정월조에 신라가 562년 또는 561년(흠명천황 22)에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嵯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손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 등 10국을 멸하였다고 전한다. 가라국은 경남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고, 안라국은 경남 함안, 사이기국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은 경남 합천 또는 경남 합천군 쌍책면, 고차국은 경남 고성, 자타국은 경남 진주 또는 거창에 위치한 가야 소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머지 국가의 위치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158~163쪽).
- 왕이 좋은 땅[良田]과 … 군사들에게 주었다 :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서는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공을 책정하여 가라(加羅) 사람 300명을 주었다. 이를 받아서 다 놓아 주고 한 사람도 남겨 놓지 않았다. 또 전지(田地)를 하사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강제로 권하므로 알천(閼川: 현재 경주시 북천)의 불모지(不毛地)를 달라고 청하였을 뿐이다.”라고 전하여 본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종래에 열전 사다함조에 불모지로 기록되어 있음에 반하여, 본 기록에 양전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주목하여, 6세기 중반에 신라에서 불모지였던 알천의 저습지를 수전 농사가 가능한 양전으로 개발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된다(鄭雲龍). 한편 신라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다른 사실에 주목하여, 사다함조의 원전(原典)이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세기(花郎世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강래, 2006; 2007, 289쪽; 전덕재, 111~112쪽)〈참고문헌〉鄭雲龍, 2004, 「 『三國史記』 斯多含傳을 통해 본 新羅 社會相」,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이강래, 2006, 「 『삼국사기』 열전의 자료계통」, 『韓國古代史硏究』 42이강래, 2007, 『三國史記 形成論』, 신서원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