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8년 : 기원후 557년
▶ 국원소경을 설치하다 : 557년 (음)
-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 18년(557)에 국원(國原)[1]을 소경(小京)[2]으로 삼았다.[3]
▶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 557년 (음)
-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 〔18년(557)〕 사벌주(沙伐州)[4]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5]를 설치하여[6] 사찬(沙飡) 기종(起宗)[7]을 군주(軍主)로 삼았다.[8] 신주(新州)[9]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10]를 설치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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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국원(國原) : 오늘날 충북 충주시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지에 가야에서 망명한 우륵(于勒)을 국원(國原)에 거주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사실과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2년(551) 3월조에 진흥왕이 낭성(娘城)에 행차하였을 때,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실,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신라가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단양 적성지역에 진출하였다고 전하는 사실 등에 근거하여 신라가 고구려에게서 국원지역을 빼앗은 것은 540년대 후반에서 551년 3월 이전이라고 본다(張俊植, 111~121쪽; 서영일, 149~151쪽; 梁起錫,; 전덕재). 경덕왕 16년(757)에 국원소경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참고문헌〉張俊植, 1998, 『新羅中原京硏究-位置 比定을 中心으로-』, 學硏文化社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學硏文化社梁起錫, 2002, 「高句麗의 忠州地域 進出과 經營」, 『中原文化硏究』 6전덕재, 2016, 「신라의 北進과 서북 경계의 변화」, 『韓國史硏究』 173
- 소경(小京) :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왕경을 대경(大京)이라고도 부르는데, 소경은 대경과 대비하여 지방에 설치한 작은 서울을 가리킨다. 소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15년(514) 봄 정월조 참조.
-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 충북 충주시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새로 개척한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국원지역이 한강유역 및 소백산맥 주변지역을 통제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지닌 곳이면서도 한강유역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침략하는 외적을 방비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거기에 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이해한다. 이와 더불어 국원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지증왕 15년(514) 정월에 설치한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은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장준식, 122~128쪽; 양기석; 전덕재).〈참고문헌〉張俊植, 1998, 『新羅中原京硏究-位置 比定을 中心으로-』, 學硏文化社양기석, 2001, 「신라 5소경의 설치와 서원소경」, 『신라 서원소경 연구』, 서경全德在, 2002, 「新羅 소경의 설치와 그 기능」, 『震檀學報』 93
- 사벌주(沙伐州) : 오늘날 경북 상주시에 해당한다. 사벌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2년(525) 2월조 참조.
- 감문주(甘文州) : 오늘날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해당한다.
-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36년(614) 2월조에 사벌주를 폐하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일선(一善)은 오늘날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해당한다. 이 기록을 통해 진흥왕 18년(557)에서 진평왕 36년(614) 사이에 감문주를 폐하고 사벌주를 설치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상주(上州)란 주명(州名)이 보이고, 사훼부(沙喙部: 사량부) 소속의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及尺干: 금찬)이 감문성군주(甘文城軍主)였다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하주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한다. 두 기록에 의거하여 상주는 진흥왕 22년(561) 이전에 설치되어 문무왕 5년까지 존속하였고, 진흥왕 22년 당시 군주가 파견된 감문성은 상주의 주치(州治)이자 군주(軍主)가 사령관인 감문정(甘文停)이란 정군단(停軍團)이 주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흥왕 18년에 사벌주를 폐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은 상주의 주치를 사벌에서 감문으로 옮긴 사실과 이때에 군주가 사령관인 정군단의 주둔지도 사벌에서 감문으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전덕재, 2001). 8세기 전반 성덕왕 때에 상주의 주치와 정군단의 주둔지를 사벌에서 감문으로 옮긴 사실을 ‘사벌주를 폐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고 고쳤고, 본서 찬자가 이것을 그대로 신라본기에 인용하였다고 이해한다(전덕재, 2018, 80~95쪽).이후 진평왕 36년 이전에 상주의 주치를 감문에서 사벌로 옮겼다가 다시 진평왕 36년에 일선으로 옮겼으며, 문무왕 5년 이후 상주를 폐하고 이전의 상주지역을 망라하는 주(州)를 일선주라고 불렀다. 신문왕 7년(685) 3월에 일선주를 폐하고 사벌주를 설치하였으며, 이것을 경덕왕 16년(757)에 상주(尙州)로 고쳤다. 이상을 종합하면 엄밀히 말해 신라인들이 감문주라는 주명을 사용한 적은 없었고, 사벌주라는 주명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신문왕 7년(687)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경덕왕 16년(757)에 감문군(甘文郡)을 개령군(開寧郡), 일선군(一善郡)을 숭선군(崇善郡)으로 고쳤다.〈참고문헌〉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기종(起宗) : 진흥왕 18년(557)에 감문군주(甘文軍主)에 임명된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다 : 중고기에 군주는 지방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면서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新州) 및 동해안의 우추군(于抽郡: 경북 영덕군 영해면)·실지군(悉支郡: 강원도 삼척시)·하서아군(何西阿郡: 강원도 강릉시) 등을 행정적으로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에 사찬 기종이 감문정의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아울러 그는 상주의 행정업무를 총괄하였을 것이다. 군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6년(505) 2월조 참조.
- 신주(新州) : 신라가 553년 7월에 경기도와 충북 북부, 강원도 영서지역을 영역으로 하여 설치한 지방통치조직이다. 신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7월조 참조.
- 북한산주(北漢山州) :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에 해당한다.
-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7월조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에 근거하여 신라가 551년에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상류의 10군(郡)과 553년에 백제에게서 빼앗은 한강 하류의 6군을 망라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고 이해한다. 북한산은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에 해당한다. 종래에 이 기록을 근거로 진흥왕 18년(557)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고 보기도 하였으나(朱甫暾, 108~109쪽; 정구복 외, 124쪽), 557년 이후에 신주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본서 권제47 열전제7 해론조에 진평왕 33년(611) 겨울 10월에 백제가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자, 진평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553년에 설치된 신주가 적어도 진평왕 33년(611)까지 존속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진흥왕 18년(557)에 신주의 주치(州治)를 북한산으로 옮긴 사실과 더불어 진흥왕 22년(561)에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한성군주(漢城軍主)가 보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주가 사령관인 정군단(停軍團)도 북한산으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대에 신라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고 고쳤고, 이것을 본서의 찬자가 그대로 신라본기에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일반적으로 신주가 설치될 당시 신주의 주치 및 정군단의 주둔지는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하는 남천(南川)으로 이해한다(姜鳳龍, 94~100쪽 및 105쪽). 한편 본서 권제37 잡지제4 지리2 삭주조에 “선덕왕(善德王) 6년, 당나라 정관(貞關) 11년(637)에 우수주(牛首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라고 전하는 기록, 진평왕 33년(611) 이후에 신주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은 사실 등에 의거하여, 선덕왕 6년(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63~66쪽).〈참고문헌〉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朱甫暾,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