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4년 : 기원후 553년
▶ 황룡사를 짓다 : 553년 02월(음)
-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 14년(553) 봄 2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1]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왕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기고는 〔계획을〕 고쳐서 불사(佛寺)를 짓고,[2]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3]
▶ 신주를 설치하다 : 553년 07월(음)
-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興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26 성왕(聖王) 31년조와 《삼국사절요》에는 州로 되어 있다.], 以阿湌武力爲軍主.
- 〔14년(553)〕 가을 7월에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4] 신주(新州)를 설치하고,[5] 아찬(阿飡) 무력(武力)[6]을 군주(軍主)로 삼았다.[7]
▶ 백제왕의 딸을 소비로 삼다 : 553년 10월(음)
- 冬十月, 娶百濟王女爲小妃.
- 〔14년(553)〕 겨울 10월에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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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월성(月城) : 월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탈해이사금 즉위년조 참조.
- 왕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기고는 〔계획을〕 고쳐서 불사(佛寺)를 짓고 : 황룡사지 금당 터를 조사한 결과, 4m 깊이로 땅을 파고 아래층으로부터 판축(板築)했음이 확인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에 근거하여 본래 황룡사 터에 넓은 면적의 늪이나 자연 웅덩이가 있어서 그것을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매립하고 그 위에 금당 등의 건물들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였다(申昌秀). 이처럼 늪지 또는 물웅덩이를 매립하고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하다가 그곳에 습기가 많아 사람이 살기가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궐을 사찰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된다. 한편 궁궐 건설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진흥왕이 궁궐을 짓던 곳에서 상서로운 징조로 표징되는 황룡(黃龍)이 출현하자, 다시 황룡을 수호신으로 잡아두기 위해 사찰로 바꾸었고, 사찰의 창건 이후에 황룡에게 호법룡(護法龍)의 역할을 부여하였다고 주장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최선자). 신라가 부체제를 벗어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자, 진흥왕은 친정(親政)과 동시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다음, 국왕과 국가의 권위를 한층 더 고양시키기 위해 신궁(新宮)을 중심으로 왕경(王京)을 재편하려고 의도하였다. 이에 진흥왕이 월성 동편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하다가 신라에 망명한 혜량법사(惠亮法師)의 자문과 건의를 받아들여 신궁 건설을 포기하고 황룡사로 전환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朱甫暾).〈참고문헌〉申昌秀, 2002, 「皇龍寺의 發掘成果」,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2,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최선자, 2013, 「신라 황룡사의 창건과 진흥왕의 왕권 강화」, 『韓國古代史硏究』 72朱甫暾, 2017, 「皇龍寺의 創建과 그 의도」, 『韓國史硏究』 176
-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 사찰의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고 부른 사실을 이른다. 현재 황룡사의 터가 경주시 절골길 215-50에 남아 있다. 황룡사(黃龍寺) 또는 황륭사(皇隆寺)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7(566) 2월조에 황룡사가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육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만 ‘용궁(龍宮)의 남쪽’에 사찰을 지었으며, “기축년(569)에 담장을 두르고 17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고 전한다. 본서와 『삼국유사』에 사찰의 완공 시점이 다르게 전하는데, 전자에서는 중요한 시설들이 갖춘 것을 기준으로, 후자에서는 건물 둘레에 담장까지 둘러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을 기준으로 완공 시점을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李基白).황룡사는 전불시대(前佛時代) 7처가람 가운데 하나이며, 신라의 삼보(三寶) 중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두 가지가 조영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일반적으로 황룡사 창건을 전후해 경주분지의 중심부부터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한 시가지를 조성했다고 보고 있다. 황룡사지는 1964년 심초석이 노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도굴되었던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를 통해 경문왕 12년(872)에 중수한 사실도 확인했다.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6년부터 1983년 12월까지 8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담장으로 둘러싸인 전체 사역(寺域)이 동서 288m, 남북 281m로 신라 왕경의 기본 가로구획 단위 4개에 해당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창건기 사찰은 가장 아래쪽에 위치했는데, 중앙부에 1탑 1금당이 자리 잡고, 금당의 동서쪽에는 단회랑(單回廊)으로 구획된 별도의 구역을 조성해 동쪽과 서쪽 및 북쪽에 승방(僧房)을 기다랗게 배치한 구조였다. 중건기 사찰 단계에서는 대형의 금당이 재건되고, 9층목탑도 완공되어 새로운 가람배치를 갖게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금당과 목탑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2개의 단회랑을 허물고, 그 대신 중금당 좌우에 동서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식으로 가람배치를 바꾸었던 것이다. 제3차 사찰은 경덕왕 13년(754)에 무게 50만근에 이르는 황룡사대종을 완성한 다음, 목탑 앞쪽 좌우에 종루(鍾樓)와 경루(瓊樓)를 배치한 형태이다. 이처럼 발굴조사를 통해 황룡사지가 크게 3차례 중건된 사실을 확인했는데(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박광열), 중건기 중금당의 규모가 정면 9칸, 측면 4칸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의 태극궁(太極宮)을 모델로 조영했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양정석, 131~142쪽).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소실되었다.〈참고문헌〉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4, 『皇龍寺 遺蹟發掘調査報告書Ⅰ』李基白, 1986, 「皇龍寺와 그 創建」,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양정석, 2004,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서경박광열, 2016, 「왕경・사찰・생산유적・지방도시」, 『신라의 유적과 유물』(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20), 경상북도
-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 : 552년 무렵에 고구려는 국내적으로 귀족들의 내분으로, 남과 북에서는 각각 신라·백제연합군과 북제(北齊) 및 돌궐의 압박을 받아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고구려는 한편으로 귀족연립정권을 수립하고, 다른 한편으로 신라에게 동맹을 제의하여 위기를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여 552년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노태돈, 395~435쪽). 그리고 553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552)조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漢城: 한강 이남의 서울과 경기도 광주·하남지역)과 평양(平壤: 한강 이북의 서울)을 버렸다.”라고 전하는데, 종래에 이 기록을 주목하여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백제가 스스로 한성과 평양지역에서 군사를 철수함으로써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주보돈).〈참고문헌〉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주보돈, 2006, 「5~6세기 중엽 高句麗와 新羅의 관계-신라의 漢江流域 진출과 관련하여-」, 『北方史論叢』 11, 고구려연구재단
-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 신라가 553년 7월에 경기도와 충북 북부, 강원도 영서지역을 영역으로 하여 설치한 지방통치조직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12년(551)조에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이 백제군과 두 나라(신라·가야)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 한강 이남의 서울과 경기도 광주시·하남시)을 먼저 차지한 다음, 이어서 평양(平壤: 한강 이북의 서울)을 공략하고 무릇 6군(郡)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신주는 신라가 차지한 10군과 백제가 차지한 6군을 망라한 영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차지한 6군에 대해서는 한산군(漢山郡: 한강 이남의 서울과 경기도 광주시·하남시)·북한산군(北漢山郡: 한강 이북의 서울)·매홀군(買忽郡: 경기도 수원시)·율진군(栗津郡: 경기도 과천시)·주부토군(主夫吐郡: 인천광역시 계산동·임학동 일대)·마홀군(馬忽郡: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으로 보는 견해(전덕재, 2009), 북한산군, 한산군, 율진군, 주부토군, 매홀군, 당성군(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술천군(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개차산군(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가운데 6군으로 보는 견해(임기환), 북한산군, 한산군(한주), 율진군, 주부토군, 술천군, 개차산군으로 보는 견해(서영일, 231~235쪽), 북한산군, 한산군, 율진군, 주부토군, 당성군, 백성군(경기도 안성시) 개차산군 가운데 6개군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교하군(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내소군(경기도 양주시), 마홀군, 개성군, 송악군, 우봉군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북한산군, 교하군, 내소군, 마홀군, 철성군(철원군), 부여군(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으로 보는 견해(張彰恩) 등이 제기되었다. 어느 견해를 따르든 간에 신주는 충북 북부지역과 임진강 이남의 경기도, 강원도 영서지역을 망라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선덕왕 6년(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01).〈참고문헌〉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노중국, 2006, 「5~6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을 중심으로」, 『北方史論叢』 11, 고구려연구재단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鄕土서울』 73張彰恩, 2011,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震檀學報』 111여호규, 2013,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高句麗와 百濟의 국경 변천」, 『백제문화』 48
- 무력(武力) : 무력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9년(532)조 참조.
- 아찬(阿飡) 무력(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 지증왕 6년(505) 2월에 처음으로 왕경인 출신의 군사로 구성된 정군단(停軍團)을 실직(悉直: 강원도 삼척시)에 주둔하게 하고, 그 사령관을 군주라고 불렀다. 사방군주체제(四方軍主體制)가 갖추어진 이후에 군주는 지방에 주둔한 정군단의 사령관이면서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新州) 및 동해안의 우추군(于抽郡: 경북 영덕군 영해면)·실지군(悉支郡: 강원도 삼척시)·하서아군(何西阿郡: 강원도 강릉시) 등을 행정적으로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전덕재). 사방군주체제는 진흥왕 16년(555)에 경남 창녕에 해당하는 비자벌에 정군단을 주둔시키고, 거기에 군주를 파견하면서 성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군단이 주둔한 곳을 주치(州治)라고 불렀고, 군주는 주치명(州治名)을 관칭(冠稱)하였다. 553년 신주를 설치할 당시에 주치는 남천(南川: 경기도 이천시)이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姜鳳龍, 94~100쪽 및 105쪽). 이에 따른다면, 553년 7월에 무력의 정확한 직임은 ‘남천군주(南川軍主)’였다고 볼 수 있다.〈참고문헌〉姜鳳龍, 1994, 「新羅 地方統治體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
-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31년(553) 겨울 10월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백제 성왕이 신라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한강 하류지역을 포기하고, 위기를 일단 면하기 위한 인적 담보물로서 왕녀(王女)를 신라 진흥왕에게 보냈고,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백제 왕녀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노중국, 400쪽). 한편 백제가 왕녀를 신라왕에게 보낸 것은 일단 신라의 한강 하류지역 점령에 대해 인정하는 듯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신라의 경계 태세를 풀고, 그러한 가운데 고구려나 신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金泰植, 300쪽).〈참고문헌〉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노중국, 2018, 『백제정치사』,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