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년 : 기원후 540년
▶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다 : 540년 07월(음)
- 眞興王立. 諱彡麥宗 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法興王之女, 妃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大校[정덕본에는 大, 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后攝政.
- 진흥왕(眞興王)[1]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2]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고,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3]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4] 입종(立宗)[5]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부인(夫人) 김씨(金氏)로서 법흥왕(法興王)의 딸이며,[6] 왕비는 박씨(朴氏) 사도부인(思道夫人)[7]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하였다.[8]
▶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의 관작을 올려주다 : 540년 08월(음)
- 元年, 八月, 大赦, 賜文武官爵一級.
- 원년(540) 8월에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9]
▶ 지진이 일어나다 : 540년 10월(음)
- 冬十月, 地震, 桃李華.
- 〔원년(540)〕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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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진흥왕(眞興王) : 신라의 제2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법흥왕 때에 정비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대외정복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야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으며, 정복지역을 순행하여 창녕과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또한 청소년 교육과 인재등용을 위해 화랑도(花郞徒)를 창설하였고, 처음으로 신라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고 거기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제작하여 안치하였으며,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해 최초로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 삼맥종(彡麥宗) :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하며, 법흥왕 26년(539)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는 심맥부지(深麥夫知)라고 전한다. 중대에 거칠부(居柒夫)를 황종(荒宗), 이사부(異斯夫)를 태종(苔宗)이라고 표기하는 관행이 나타났는데, 마찬가지로 중대에 심맥부(심맥부지) 또는 삼맥부를 심맥종(深麥宗 또는 삼맥종(彡麥宗)으로 고쳐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서 진흥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15살이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종래에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37년(576) 8월조에 “왕은 어린 나이[幼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믿었다.”라고 전하는 사실과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과인은 어린 나이[幼年]에 왕위를 계승하여, 보필하는 신하에게 정사를 위임하였다.”라고 전하는 사실, 15세 이상을 역역에 징발하고, 화랑도의 수련이 15세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등을 두루 주목하여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韓國古代社會硏究所, 60쪽). 그런데 일부 학자는 기록에 전하는 ‘유년(幼年)’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매우 어린 나이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점,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 537년에 사망하였는데, 7세설을 따를 때에 진흥왕에게 숙흘종(肅訖宗)과 만호부인(萬呼夫人)이란 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48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들어 진흥왕이 15세에 즉위하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金龍善; 李晶淑, 1994; 2012, 23~27쪽; 전덕재).〈참고문헌〉金龍善, 1979,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신라1·가야편)』,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전덕재, 2014, 「異斯夫의 家系와 政治的 位相」, 『史學硏究』 115
- 갈문왕(葛文王) : 갈문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즉위년조 참조.
- 입종(立宗) : 제23대 법흥왕의 친동생이자, 제24대 진흥왕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지증왕(智證王)이고,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부인은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只召夫人)이다.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사부지(徙夫智)’, 539년(법흥왕 26)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 ‘사부지(徙夫知)’라고 전한다. 중대에 ‘사부지’를 ‘입종(立宗)’으로 고쳐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에 나오는 ‘정사년왕과거(丁巳年王過去)’라는 구절을 ‘정사년에 왕께서 돌아가셨다’로 해석하여 정사년, 즉 537년에 사부지갈문왕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강종훈, 1999, 「울주 천전리 서석 명문에 대한 일고찰」, 『울산연구』 1, 울산대학교 박물관). 입종갈문왕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은 진흥왕의 맏아들이자, 그녀의 조카인 동륜(銅輪)과 혼인하여 진평왕(眞平王) 등을 낳았다.
- 어머니는 부인(夫人) 김씨(金氏)로서 법흥왕(法興王)의 딸이며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4 진흥왕조에 어머니는 지소부인(只召夫人)으로 전하며, 법흥왕 26년(539)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는 ‘지수시혜(只須尸兮)’라고 전한다. ‘지수시혜’를 ‘지몰시혜(只沒尸兮)’로 판독하기도 하나, ‘지수시혜’로 판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金龍善, 1979,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
- 사도부인(思道夫人)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5 진지왕조에 진지왕의 어머니가 박영실(朴英失) 각간(角干)의 딸 식도부인(息途夫人) 또는 색도부인(色刀夫人) 박씨(朴氏)라고 전하는데, 진지왕의 아버지가 진흥왕이므로, 여기에서 진흥왕비를 식도부인 또는 색도부인이라고 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같은 책의 왕력 제24 진흥왕조에서 “(진흥왕의) 어머니는 지소부인(只召夫人) 또는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朴氏)로서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지소부인만이 진흥왕의 어머니이고, 식도부인은 진흥왕비인데, 진흥왕의 어머니인 것처럼 잘못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하였다 : 왕태후는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을 가리킨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진흥왕조에서 진흥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가 15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태후는 바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부인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을 가리킨다. 종래에 법흥왕의 비인 보도부인이 섭정하였다고 보기도 하였으나(李丙燾, 56쪽),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巴刀夫人: 보도부인)이 출가하여 법명을 법류(法流)라고 하고, 영흥사(永興寺)에 주석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졌음을 주목하건대, 섭정의 주체는 왕태후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라고 봄이 합리적이다(金龍善; 이정숙, 1994; 2012, 28~29쪽).〈참고문헌〉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金龍善, 1979,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李晶淑,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 『釜山女大史學』 12;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 신라가 진흥왕 때에 관리를 문관과 무관으로 나누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때에 관리들에게 17관등을 수여하였으므로, 이것은 관리들의 관등을 한 등급씩 올려준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본 기록에서 ‘문무관의 관작’이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상고기뿐만 아니라 중고기에도 신라인들이 관등을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작(爵)과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하일식, 2006,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 123~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