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7년 : 기원후 520년
▶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 공복의 위계를 제정하다 : 520년 01월(음)
-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朱紫之秩.
- 7년(520) 봄 정월에 율령(律令)[1]을 반포하고,[2] 처음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에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제정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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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율령(律令) : 율령은 기본적으로 율(律)·령(令)·격(格)·식(式)으로 구성되었다. 율은 죄와 벌을 규정한 오늘날 형법(刑法)에 해당하고, 영은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각종 제도 등을 규정한 행정법규를 뜻한다. 식은 율령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시행세칙을 말하며, 시대의 변화에 대응해 율령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기 전까지의 사이에 제정된 법령을 묶은 것을 격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전국시대에 씨족제에 기초한 봉건체제가 무너지면서 국가의 규모가 확대되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죄와 벌을 규정한 형법 중심의 법전(法典)이 편찬되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이룬 진(秦)과 한(漢)에서 국가의 통치조직과 관료기구가 비대해지면서 그것들을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행정법규의 정비가 불가피하였다. 이때에 행정법규는 필요할 때마다 내린 황제의 조칙(詔勅)에 기초하여 마련되었고, 그 내용도 형벌법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형률의 보조적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서진(西晉) 때에 이르러 행정법규인 영이 율에서 명확하게 분리되었고,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격과 식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수·당에서 율령격식을 기본으로 하는 율령체제를 완비하였다. 수와 당의 율령체제는 우리나라와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어 통치질서의 골간을 이루기도 하였다(堀敏一, 1982, 「中國における律令制の成立」,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學生社).
-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 일찍이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은 중국 서진(西晉)의 태시율령(泰始律令)을 모법(母法)으로 한 고구려율령을 기초로 하여 제정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田鳳德, 1956), 일본인 학자는 520년에 반포된 율령은 신판(神判)·신서(神誓)와 같은 전통·고유법적인 요소가 남아 있으면서도 율과 영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은 내용이었으며, 태종무열왕대 이후 당(唐) 율령의 영향 하에서 중국의 율령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고 주장하였다(林紀昭, 1967). 예전에 율령의 반포를 불교의 수용 및 공인과 더불어 삼국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하였음을 알려주는 핵심 지표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 발견 이후, 법흥왕 11년(524) 무렵에도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하지 못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기존의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하였고, 이들 세 비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율령 반포의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해 새롭게 살핀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다. 먼저 6세기 전반까지 공론(共論)에 따른 교령(敎令)에 의거하여 만든 법을 교령법이라고 명명한 다음, 520년에 반포한 율령은 단행법령적인 성격의 교령법을 축적하고, 이것들을 추상화·일반화하여 제정한 법조문에 기초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고(김창석, 2010), 한편 법흥왕대 율령의 반포는 외부의 새로운 법전을 도입하거나 참조하여 새로운 법전의 편찬을 통한 법체계의 성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행법령에 기초한 기존의 법체계를 정리·체계화하여 동일한 법체계를 신라 전 영역에 일원화하여 적용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도 제출되었다(홍승우, 2011). 이외에 신라는 520년 이전에 반포한 교령(敎令) 및 판례문, 중국 및 고구려의 형률체계를 참조하여 정리한 형률조문과 훼부(喙部)·사훼부(沙喙部) 및 지방의 지배층을 17관등체계와 외위체계에 편제하고,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 정리한 행정법규 등을 기초로 하여 520년에 율령을 집대성하였다는 사실, 중고기의 율령은 단행법을 집성(集成)한 성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골격을 보여주는 청사진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견해도 발표되었다(전덕재, 2011).〈참고문헌〉田鳳德, 1956, 「新羅의 律令攷」, 『서울大學校論文集(人文社會科學)』 4; 1968, 『韓國法制史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林紀昭, 1967, 「新羅律令に關する二·三の問題」, 『法制史硏究』 17, 法制史學會김창석, 2010, 「신라 法制의 형성 과정과 율령의 성격-포항중성리신라비의 검토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58전덕재, 2011, 「신라 율령 반포의 배경과 의의」, 『歷史敎育』 119洪承佑, 2011, 「韓國 古代 律令의 性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처음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 위계(位階)를 제정하였다 : 본서 권제33 잡지제2 색복조에 “법흥왕(法興王) 때에 태대각간(太大角干)에서 대아찬(大阿飡)까지 자색(紫色)의 옷을 입고, 아찬(阿飡)부터 급찬(級飡)까지 비색(緋色)의 옷을 입고 아울러 아홀(牙笏)을 들며,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는 청색(靑色)의 옷을, 대사(大舍)에서 선저지(先沮知)까지 황색(黃色)의 옷을 입는다고 정하였다. 또한 이찬과 잡찬은 금관(錦冠), 파진찬(波珍飡)과 대아찬(大阿飡), 금하(衿荷)는 비관(緋冠), 상당(上堂)과 대나마(大奈麻), 적위(赤位), 대사(大舍)는 조영(組纓)을 착용한다고 정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종래에 이러한 규정이 바로 520년(법흥왕 7)에 제정한 백관 공복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와 더불어 이때에 골품제를 완비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었다(金哲埈; 申東河; 李鍾旭, 107~116쪽). 반면에 일부 학자는 색복지에 전하는 관제(冠制)는 법흥왕대 품주(稟主) 조직 내에서 금하대등(衿荷大等)과 그 이하의 관직자들이 썼던 관을 규정한 것이라고 이해한 다음, 당나라의 의관제(衣冠制)를 수용하여 신라의 의관제를 개정한 진덕여왕대에 성골(聖骨)이 소멸됨과 동시에 비로소 두품제(頭品制)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골품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에 의거하여 자비청황색(紫緋靑黃色)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를 정비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木村誠). 또 금하와 상당·적위가 모두 사원성전(寺院成典)의 관리였고,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행정관서의 관직체계가 비로소 진덕여왕대에 정비된 사실 등을 주목하여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는 당나라의 의관제를 수용한 진덕여왕대에 정비되었다고 이해한 다음, 문무왕 8년(668)에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처음 수여하였다는 사실, 520년 무렵에 대아찬과 대나마 관등을 비로소 설치하였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자·비·청·황색을 기초로 한 공복제 역시 진덕여왕대에 정비하였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진골과 6~4두품과 같은 법제적인 신분을 기본으로 하는 골품제는 진덕여왕대에 완비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全德在, 1996, 160~182쪽; 2000).한편 일부 학자는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의 규정이 당나라의 그것과 차이가 있고, 당나라 고조(高祖: 재위 618~626) 때에 자비녹황색(紫緋綠黃色)을 기본으로 하는 공복제가 정비된 사실에 주목하여 해당 규정을 신라 고유의 것으로 보았다. 즉 진평왕대에서 당나라 의관제를 수용한 진덕여왕대 사이에 자비청황색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공복제와 관제를 정비하였고, 그 이전에는 자주색과 붉은 색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 고유의 공복제와 나마례관(奈麻禮冠) 등과 같은 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 고유의 관제가 시행되었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권준희, 2001, 82~86쪽; 2002). 이밖에 520년에 신라의 전통적 색체 위계에 의거하여 자비청황색(紫緋靑黃色)을 기본으로 하는 공복제(公服制)를 정비하고, 주자비색(朱紫緋色)을 기초로 한 중국식 색채 위계를 일부 수용하여 관제(冠制)를 정비하였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정덕기).〈참고문헌〉金哲埈, 1956,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90,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木村誠, 1976, 「6世紀における骨品制の成立」, 『歷史學硏究』 428申東河, 1979, 「新羅 骨品制의 形成過程」, 『韓國史論』 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李鍾旭, 1999, 『新羅骨品制硏究』, 一潮閣전덕재, 2000,「7세기 중반 관위규정의 정비와 골품제의 확립」, 『한국 고대의 신분제와 관등제』, 아카넷권준희, 2001, 「신라 복식의 변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박사학위논문권준희. 2002 「삼국시대 품급별 복색(服色)제도의 제정시기에 관한 연구」, 『韓服文化』 5-1정덕기, 2017, 「신라 중고기 公服制와 服色尊卑」, 『新羅史學報』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