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AD 184~196) 7년 : 기원후 190년
▶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구도를 좌천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다 : 190년 08월(음)
- 七年, 秋八月, 百濟㰍[정덕본에는 㰍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襲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襲이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襲을 따랐다.]西境圎山郷, 又進圍𦈢[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𦈢로 되어 있다. 𦈢는 缶의 속자이다.]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以薛支爲左軍主.
- 7년(190) 가을 8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圓山鄕)[1]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缶谷城)[2]을 포위하였다. 구도(仇道)[3]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蛙山)[4]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5]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그를〕 부곡성주(缶谷城主)로 강등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6]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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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원산향(圓山鄕)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용궁현(龍宮縣) 건치연혁조에서 본래 신라의 축산(竺山)이라고 전하며, 그 세주로 원산(園山)이라고도 했음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세주의 내용에 입각해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고(李丙燾, 47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3 전라도 진산현 고적조에 나오는 원산향(猿山鄕)과 동일한 곳으로 보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千寬宇, 302쪽). 본서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 26년(8) 10월조에 나오는 원산(圓山) 및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의 원산성(圓山城)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참고문헌〉李丙燾, 1983, 『三國史記』, 乙酉文化社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 부곡성(缶谷城)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조 내에 있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읍호(邑號)조 부계(缶溪)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부계면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47쪽; 千寬宇, 302쪽).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나온다. 본서 권50 열전10 견훤전에서 928년 11월에 견훤이 부곡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전하며, 본서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2년(928) 10월에 견훤이 함락시킨 무곡성(武谷城)도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 태조 11년(928) 11월조에는 이름이 오어곡성(烏於谷城)으로 되어있다.〈참고문헌〉李丙燾, 1983, 『三國史記』, 乙酉文化社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 구도(仇道) : 아달라이사금대와 벌휴이사금대에 활동한 생몰년 미상의 인물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부친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19년(172) 정월조의 구도에 대한 주석 참조.
- 와산(蛙山) :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8년(64) 8월조의 와산성에 대한 주석 참조.
- 백제가 … 패하였다 : 본서 권23 백제본기1 초고왕 25년(190) 8월조에 동일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좌군주(左軍主) : 군주는 신라 최고 지방행정단위인 주(州)의 장관직으로, 원래는 군단의 최고지휘자 직위에서 유래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주에 1명 있는 지방관으로서는 있기 힘든 칭호인 ‘좌군주’라 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지방장관이라기보다 군단 지휘관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후대의 군주 칭호를 소급하여 적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세한 내용은 벌휴이사금 2년(185) 2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