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AD 112~134) 14년 : 기원후 125년
▶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 125년 01월(음)
-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 14년(125) 봄 정월에 말갈(靺鞨)[1]이 북쪽 경계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 말갈이 다시 쳐들어오다 : 125년 07월(음)
-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 〔14년(125)〕 가을 7월에 또 대령(大嶺)[2]의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3]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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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말갈(靺鞨) : 일반적으로 6~10세기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한 퉁구스계 종족에 대한 지칭이다. 중국 역사서에 ‘말갈(靺鞨)’이란 종족명은 『북제서(北齊書)』 무성제기(武成帝紀) 청하(河淸) 2년(563)조에 처음 나온다. 이후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말갈전이 수록되어 있는데(『신당서』 이하는 흑수말갈전), 특히 『수서』 말갈전에는 ‘말갈 7부(部)’의 존재가 나타나 있다. 이들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말갈이라는 일원적 계통으로 보는 견해와 지역, 부족에 따라 숙신(읍루)계와 예맥계(濊貊系)로 계통을 달리해서 보는 다원적 계통론이 있다(김현숙, 2018). 후자의 경우 본서에 나오는 말갈 기사가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본서 본기에는 말갈이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6세기 이후의 말갈은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초기 기사의 말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시기적, 지역적으로 도저히 같은 존재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말갈은 낙랑 또는 고구려에 연결되어 신라나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실체가 동예(‘東沃沮의 濊人, 漢史의 不耐濊’라고 함)이며 남북국 시기에 신라인들이 북도(北道)를 말갈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 기록의 북쪽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말갈로 기록했다고 하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제시하였다(丁若鏞, 「靺鞨考」).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고 있는데, 예컨대 동예 외에 영서 지역에도 예족이 거주했으며 본서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예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文安植, 1998). 초기 기사의 ‘말갈’은 애초 사료에 ‘예맥(濊貊)’으로 표기되었던 종족이 후대 사서 편찬 시 일괄적으로 ‘말갈’로 개필된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11). 한편 말갈의 다원적 계통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본서에서 이른 시기의 예계 종족을 말갈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6세기 이후에 말갈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참고문헌〉丁若鏞, 「靺鞨考」,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其2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3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강종훈, 201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東北亞歷史論叢』 61
- 대령(大嶺) :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 대관령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쪽),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이하(泥河) : 신라 영역의 북쪽에 위치한 하천으로, 구체적으로 오늘날 어느 하천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신라본기에서는 본 기사 외에도 세 차례 더 등장하는데(권3 자비마립간 11년(468) 9월조, 소지마립간 3년(481) 3월조 및 18년(496) 7월조), 모두 말갈이나 고구려의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그 이름이 나타나며, 특히 자비마립간 11년(468) 9월조의 기사에서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방을 가리키는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 나이가 15세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이하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어, 강릉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하천으로 일단 짐작해 볼 수 있다.기존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바, 실제로 강릉 일대의 하천으로 보는 설과 대관령을 넘어 서쪽으로 남한강 상류 일대의 하천으로 파악하는 설이 그것이다. 우선 강릉 일대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강역고』 권2, 발해고에서 “또 이하를 살펴보니, 우리 강릉의 북쪽에 있는 이천수(泥川水)이다. 신라 자비왕 때 하슬라인(지금의 강릉)을 징발하여 이하성을 쌓았고, 또 소지왕 때 구려와 말갈의 병사들을 이하의 서쪽까지 추격했다고 하니 곧 이곳이다. 발해와 신라가 일찍이 이하를 경계로 한즉, 양양 이북은 모두 발해가 얻은 땅이다(又按泥河者, 我江陵之北泥川水也. 新羅慈悲王時徵何瑟羅人(今江陵)築泥河城, 又炤知王時追擊句麗靺鞨兵于泥河之西卽此地也. 渤海新羅旣以泥河爲界則襄陽以北皆渤海之所得也).”라고 주장한 이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이어져 왔다. 그렇지만 강릉 지역에서도 이하의 구체적인 위치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달라 강릉의 성남천(城南川)을 주목하기도 하고(李丙燾, 34쪽), 대관령 북쪽의 이현(泥峴)에서 발원하는 연곡천(連谷川)에 비정하기도 하였다(徐炳國, 244~256쪽; 金澤均, 68~70쪽).한편 남한강 상류설은 일본인 학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강원도 정선(旌善)의 옛 이름 잉매현(仍買縣)의 ‘잉(仍)’이 ‘이(泥)’와 음운상 비슷한 데서 착안하여 주장한 것으로, 소지마립간 18년(496) 7월조 기사에 함께 나오는 지명으로서 고구려와의 교전지였던 우산성(牛山城)의 위치까지도 고려한 것이었다(津田左右吉, 78~79쪽, 96~98쪽). 이후 많은 연구자가 이 견해를 발전시켰는데,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酒井改藏과 이강래, 정운용, 井上秀雄, 서영일, 홍영호 등이 있다.참고로 이하(泥河)는 본서 외에 『신당서』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발해가 남쪽으로 신라와 맞닿아 이하를 경계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다(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 『신당서』 기록에 보이는 이하는 대체로 통일신라 당시 발해와의 국경을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진, 함경남도 영흥군(현 금야군)의 용흥강(현 금야강)에 비정된다.〈참고문헌〉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徐炳國, 1981, 「新唐書渤海傳所載 泥河의 再檢討」, 『東國史學』 15·16金澤均, 1997, 「東濊考」, 『江原文化硏究』 16, 江原大學校 江原文化硏究所津田左右吉, 1913, 『朝鮮歷史地理 上』(아세아문화사 刊, 1986)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朝鮮學會李康來, 1985, 「 『三國史記』에 보이는 靺鞨의 軍事活動」, 『領土問題硏究』 2,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鄭雲龍, 1989, 「5世紀 高句麗 勢力圈의 南限」, 『史叢』 35井上秀雄, 1993, 「古代朝鮮の城郭史」, 『古代東アジアの文化交流』, 溪水社徐榮一, 1999, 『新羅 陸上 交通路 硏究』, 학연문화사홍영호, 2010, 「 『三國史記』 所載 泥河의 위치 비정」, 『韓國史硏究』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