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21년 : 기원후 77년
▶ 가야와 황산진에서 싸우다 : 77년 08월(음)
-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吉門與加耶兵戰於黄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為波珍湌, 賞㓛也.
- 21년(77) 가을 8월에 아찬(阿飡)[1] 길문(吉門)[2]이 가야(加耶)[3]의 병사들과 황산진(黃山津)[4] 어귀에서 싸움을 벌여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波珍飡)[5]으로 삼고 군공을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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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아찬(阿飡) : 신라 경위 17관등제의 제6등에 해당하는 관등.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 길문(吉門)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이곳 외에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 가야(加耶) : 삼국시대에 백제, 신라와 함께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삼한의 하나인 ‘변진(弁辰: 변한)’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의 각종 사서에 ‘가라(加羅)’라는 명칭으로도 나온다. 애초에는 김해 지역의 가락국(금관국, 금관가야)을 중심으로 연맹체(전기 가야연맹체)를 구성했다가, 4세기 말 고구려군의 남정을 계기로 가락국의 주도권이 붕괴되자 5세기 후반부터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가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후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본 기사에서의 ‘가야’는 황산진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아, 김해의 가락국(금관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황산진(黃山津) : 지금의 경남 김해시와 양산시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 하류의 나루터. 조선 세종 대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김해부 도진(渡津)조에 따르면, 부(府)의 동쪽에 황산진이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경남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동쪽에 있던 나루터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金泰植, 70쪽). 이와는 달리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한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의 황산역터 근처를 황산진의 위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38~42쪽).〈참고문헌〉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 파진찬(波珍飡) : 신라 경위 17관등제의 제4등에 해당하는 관등.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