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11년 : 기원후 67년
▶ 주주와 군주를 설치하다 : 67년 01월(음)
- 十一年, 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内州郡, 號爲州主·郡主.
- 11년(67)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 나라 안의 주(州),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1] 주주(州主),[2] 군주(郡主)[3]라고 불렀다.
▶ 순정을 이벌찬에 임명하다 : 67년 02월(음)
- 二月, 以順貞爲伊伐湌, 委以政事.
- 〔11년(67)〕 2월에 순정(順貞)[4]을 이벌찬(伊伐飡)[5]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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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박씨의 … 다스리게 하고 : 이 시기에는 비록 탈해가 석씨 족단의 대표자로서 신라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전에 왕을 배출한 박씨 족단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했으므로, 박씨 족단의 주요 인물들에게 신라 영역 각지를 분봉하여 그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공납의 책임을 맡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동옥저조에 보이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대가(大加)’로 하여금 동옥저로부터 공납을 책임지게 했다는(使大加統責其租稅) 것과 유사하다.
- 주주(州主) : 명칭으로 보면 주(州)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진 관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중국식 지방 행정 단위의 명칭인 ‘주(州)’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주주(州主)’를 당시의 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라에서 ‘주(州)’가 정식 행정 단위로 등장하는 것은 금석문상 6세기 이후의 일이며, 주의 장관 이름도 ‘주주(州主)’가 아니라 ‘군주(軍主)’였다. 참고로 본 기사에 나온 ‘주주(州主)’는 본서 파사이사금 11년 7월조와 지증마립간 3년(502) 3월조에도 사례가 보인다.한편 본 기사에서의 ‘주주(州主)’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중앙으로부터 지방의 거점성에 파견된 성주로 보는 견해(이부오, 76~78쪽), 6부의 지배자가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상황에서 군현제적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되어 왕의 지배를 상징적으로 대리하면서 권농과 진휼 등을 담당하던 관리로 보는 견해(서의식, 130~131쪽), 탈해이사금이 박씨 세력을 견제하고 그 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지방에 강제 이주시킨 결과 해당 지역에서 토착 세력화하여 후대 사서에 ‘주간(州干)’ 등으로 기록되게 된 박씨 유력자들로 보는 견해(주보돈, 15~17쪽) 등이 있다.〈참고문헌〉서의식, 1990, 「新羅 「中古」期 六部의 部役動員과 地方支配」, 『韓國史論』 23朱甫暾, 1998, 「朴堤上과 5세기 초 新羅의 政治 動向」, 『慶北史學』 21이부오, 2003, 『신라 군·성[촌]제의 기원과 소국집단』, 서경
- 군주(郡主) : 명칭으로 보면 군(郡)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진 관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중국식 지방 행정 단위의 명칭인 ‘군(郡)’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군주(郡主)’를 당시의 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라에서 ‘군(郡)’이 정식 행정 단위로 등장하는 것은 금석문상 6세기 이후의 일이며, 6세기의 경우에도 군급(郡級) 행정 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의 이름은 ‘군주(郡主)’가 아니라,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등에 ‘군주(軍主)’의 하위, ‘도사(道使)’의 상위로 등장하는 ‘당주(幢主)’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6세기 당시의 당주는 그 이름에서도 엿보이듯, 관할 구역에서 민정보다는 군사와 관련한 업무를 주로 관장했을 것이다. 참고로 본 기사에 나온 ‘군주(郡主)’는 본서에서 파사이사금 5년 5월조, 파사이사금 11년 7월조, 지증마립간 3년(502) 3월조 등에서도 사례가 보인다.
- 순정(順貞)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이곳 외에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 이벌찬(伊伐飡)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등에 해당하는 관등. 자세한 것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한편 지마이사금 즉위조를 보면, 이벌찬의 이칭인 ‘각간(角干)’이 처음 두어진 시기가 파사이사금 대로 나오는바, 이 기사에서의 이벌찬은 기록상 착오이거나 후대 기사가 잘못 소급되어 들어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