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3일 수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대 유리이사금(AD 24~57) 17년 : 기원후 40년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57) 17: 기원후 40

 

화려와 불내가 침략해 오다 : 4009()

 

  •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 17(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1]과 불내현(不耐縣)[2]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3]의 거수(渠帥)가 군사를 내어 곡하(曲河)[4]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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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화려현(華麗縣) :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던 영동 7현의 하나. 애초에는 임둔군 소속의 현이었다가 B.C. 82년에 임둔군이 소멸하자 현도군으로 이속되었다가, 얼마 후 현도군마저 퇴축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 현으로 바뀌었다. 현재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토성지가 남아 있는데, 이를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207~208).
  2. 불내현(不耐縣) :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던 영동 7현의 하나로, 동부도위의 치소이기도 하다. 한서28 지리지 낙랑군조에는 불이(不而)’로 나온다. 애초에는 임둔군 소속의 현이었다가 B.C. 82년에 임둔군이 소멸하자 현도군으로 이속되었고, 얼마 후 현도군마저 퇴축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 현으로 바뀌었다. 서기 30년에 동부도위가 혁파되면서 불내현은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고, 그 후 어느 시기엔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삼국지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예()조에 의하면,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이끄는 위()군이 영동예(嶺東濊)를 정벌하자 불내후(不耐侯) 등이 항복하였다고 하며, 247년에 이들이 조공을 바쳐오니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고 전한다. 불내현의 구체적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재의 강원도 통천 또는 안변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5~202).
  3. 맥국(貊國) : 맥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2를 비롯하여 고려사58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46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조 등에서는 춘천을 맥국의 소재지로 소개하고 있으나, 본 기사에 함께 나오는 화려현과 불내현이 영동 지방에 위치했음을 고려하면, 춘천보다는 동해안에 가까운 지역에 있던 소국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4. 곡하(曲河) : 위치는 알 수 없음.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략하면서 접근한 곳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동해안 지역의 어떤 하천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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