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57) 14년 : 기원후 37년
▶ 낙랑인이 투항해 오다 : 37년 (음)
-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 14년(37)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1]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투항해 오니 6부(六部)[2]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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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고구려왕 … 멸망시켰다 :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0년(37)조에 관련 사실이 보인다. 다만 거기에는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王襲樂浪滅之].”라고만 짧게 언급되어 있고, 본 기사에 보이는 낙랑인 5,000명의 신라 투항 기사는 덧붙여 있지 않다. 기사 내용의 구체성을 감안하면, 본 기사가 고구려본기의 것을 따왔을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고구려본기의 기사가 본 기사를 연대에 맞춰 재배치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본 기사에서 고구려왕 무휼 즉 대무신왕이 거론된 것은, 후대의 편사자가 저본(底本) 자료에 유리이사금 14년(37) ‘낙랑인’의 신라 내투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이보다 5년 앞서 고구려가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을 소멸시켰다는 고구려본기 쪽의 기사를 참고하여 그와 연관시켰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기사가 다시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 20년조에 전재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70쪽).
- 6부(六部) : 상고기에 신라 국가를 구성했던 6개의 정치체. 그렇지만 본 기사에서 전하는 시기에 6부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