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10년 : 기원후 509년
▶ 서울에 동시를 설치하다 : 509년 01월(음)
-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 10년(509) 봄 정월에 서울[京都]에 동시(東市)[1]를 설치하였다.
▶ 함정을 설치하다 : 509년 03월(음)
- 三月, 設檻穽以除猛獸之害.
- 〔10년(509)〕 3월에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로부터 입는 피해를 없앴다.
▶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 509년 07월(음)
- 秋七月, 隕霜殺菽.
- 〔10년(509)〕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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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동시(東市) : 신라 왕경(서울)의 동쪽에 설치한 시장이다. 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 상(上) 동시전(東市典)조에서 지증왕 9년(508)에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53년(631) 5월조에 반란을 꾀한 이찬 칠숙(柒宿)을 붙잡아 동시에서 목을 베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동시와 더불어 동시전을 설치하였다고 이해하여, 신라본기와 직관지 기사 가운데 하나는 오기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동시의 설립을 계획하기 위해 동시전을 지증왕 9년(508)에 설치하였다가 지증왕 10년(509) 정월에 동시를 설치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金昌錫, 2007; 2016).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에 소지마립간 12년(490) 3월에 처음으로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켰다고 전하는데, 이때에 개설한 시사를 동시와 별개의 장소에 설치한 시장으로 보는 견해(金昌錫, 2016)와 490년에 설치한 시사를 509년에 개편하였고, 효소왕 때에 서시(西市)를 설치하면서 이전까지 그냥 시장(시사)으로만 불렀던 것을 동시(東市)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李成市; 이현태). 동시가 월성 동편의 안압지-황룡사지-북천-명활산성-낭산을 경계로 하여 이루어진 월성 동편 일원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金昌錫, 2016), 황룡사지 남쪽 주변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朴方龍, 2006) 등이 제기되었다.〈참고문헌〉朴方龍, 2006, 「新羅王京과 流通」,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7,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金昌錫, 2007, 「왕경인의 소비생활과 교역」,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8,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李成市, 2007, 「新羅王京の三市について」, 『古代東アジアの社會と文化』, 汲古書院金昌錫, 2016, 「新羅 왕경 내 市場의 위치와 운영」, 『한국문화』 75이현태, 2017, 「신라 왕경의 방제시행과 이원적 공간구조 형성」, 『문헌으로 보는 신라의 왕경과 월성』,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