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AD 417~458) 2년 : 기원후 418년
▶ 시조묘에 배알하고 복호가 돌아오다 : 418년 01월(음)
- 二年,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自髙句麗與堤上奈麻還來.
- 2년(418)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1]에 몸소 배알하였다.왕의 동생 복호(卜好)[2]가 고구려에서 나마(奈麻)[3] 제상(堤上)[4]과 함께 돌아왔다.
▶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쳐 돌아오다 : 418년 (음)
- 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 〔2년(418)〕 가을에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5]이 왜국(倭國)에서 도망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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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시조묘(始祖廟) : 신라에 있었던 사당으로, 국가 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3년(6) 정월조의 주석 참조.
- 복호(卜好) : 본서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11년(412)조의 주석 참조.
- 나마(奈麻)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11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 제상(堤上) : 신라 눌지왕대의 충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서 신라본기와 박제상전,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나온다. 박제상전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하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되어 있다. 박제상전에는 그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이라고 되어 있지만,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조)에는 그가 김씨로 나타나 있다. 박제상전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빙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조부 박아도만 하더라도 일성이사금 15년(148)에 갈문왕이 된 것으로 나타나 있어 본서의 기년(紀年)을 따른다면 눌지마립간 2년(418)에서 270년의 차이가 난다. 신라본기에는 기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가계 전승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부인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을 보면 실성왕이 치술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어 제상을 실성왕의 사위로 보기도 한다(宣石悅, 2001, 「朴堤上의 家系와 관등 奈麻의 의미」, 『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혜안, 257~258쪽). 신라본기에는 나마(奈麻) 관등을 지닌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박제상전에서는 벼슬을 하여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주제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삽량(촌), 즉 양산 지역의 간 내지 지방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왜에서 순국한 뒤에는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였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부인으로 삼았다.
- 미사흔(未斯欣) : 나물마립간의 아들이자 눌지마립간의 동생. 본서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원년(402) 3월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