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AD 402~417) 1년 : 기원후 402년
▶ 실성이사금이 즉위하다 : 402년 02월(음)
-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湌之子. 母伊利夫人, 伊一作企.昔登保阿干之女. 妃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逹有逺識. 奈勿薨, 其子㓜少, 國人立實聖繼位.
-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1]이 즉위하였다.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2]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부인(伊利夫人)[3] 이(伊)는 기(企)로도 썼다.으로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4]의 딸이다. 왕비[5]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尺) 5촌(寸)으로,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앞일을 헤아려 알 수 있는 식견이 있었다. 나물(奈勿)이 죽고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 402년 03월(음)
-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 원년(402) 3월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나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6]을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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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 신라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이라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 나물(奈勿)부터 마립간을 칭했기 때문에 실성마립간이 맞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립간호가 실성에 의하여 일단 폐지되었다가 눌지 때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白, 22쪽 각주 30; 주보돈, 179~180쪽). 실성의 아버지는 대서지(大西知)인데 (왕력편)에서는 그가 미추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성은 나물과 같이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가 된다. 전왕인 나물마립간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사촌이면서 동서인 실성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나물의 경우 그 아버지, 어머니, 부인이 모두 김씨였던 데에 반하여 실성은 모계(母系)가 석씨였다. 따라서 실성은 석씨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장창은, 96쪽). 실성은 나물마립간 37년(392)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나물마립간이 죽기 1년 전인 401년 돌아와 이듬해 즉위하였다. 그는 나물마립간의 아들 미사흔과 복호를 각각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으며, 눌지 또한 해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원한을 사 죽임을 당하였다.〈참고문헌〉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장창은, 2008,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주보돈, 2016, 「마립간기의 출범과 부체제」, 『신라의 건국과 성장(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02)』, 경상북도
- 대서지(大西知) : 실성마립간의 아버지.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미추왕(未鄒王)의 동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시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아들이면서 미추와 말구(末仇)의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 이리부인이다.
- 이리부인(伊利夫人) : 실성마립간의 어머니로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예생부인(禮生夫人) 석씨(昔氏)라고 되어 있다.
- 석등보(昔登保) :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석등야(昔登也)라고 되어 있다.
- 왕비 :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왕비가 아류부인(阿留夫人)이라고 되어 있다.
- 미사흔(未斯欣) : 나물마립간의 아들이자 눌지마립간의 동생.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서 신라본기와 박제상전,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나온다. 먼저 신라본기에 의하면 그는 실성이사금 원년(402)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고 눌지마립간 2년(418) 왜국에서 도망해 돌아왔으며, 동왕 17년(433) 사망하여 서불한(舒弗邯)으로 추증되었다. 또 자비마립간 4년(461)에는 왕이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그 사이에서 소지마립간이 태어났다. 박제상전에는 박제상(朴堤上)이 왜국으로 들어가 자신을 희생하여 미사흔을 구출해냈으며, 미사흔은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서는 미사흔을 미해(美海) 또는 미토희(未吐喜)라고 하였으며, 나물왕 36년(391) 경인년(390)에 10살의 나이로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다고 한 부분이 차이가 있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에도 나오는데 진구[神功] 황후 섭정 5년에 신라왕이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을 보내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즉 미사흔을 도망가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