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2일 금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6대 흘해이사금(AD 310~356) 21년 : 기원후 330년

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AD 310~356) 21: 기원후 330

 

벽골지를 만들다 : 330()

 

  •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歩.
  • 21(330)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1]를 만들었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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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벽골지(碧骨池)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있는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金堤 碧骨堤)를 이른다. 삼국유사왕력제1에는 329년의 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백제 후기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洪思俊, 7~8). 하지만 1975년 발굴조사 당시 제방 바닥에서 채취한 탄화된 식물을 시료로 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에 따르면 대략 4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어 이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尹武炳, 11). 또 발굴성과가 축적되면서 통해 4세기 축조설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최완규, 178~185).
    축조 주체와 관련해서는 이 당시는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백제의 기록이 신라본기에 잘못 들어온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병도 역주, 58). 그렇게 본다면 이 일은 백제 비류왕 27(330)의 사적이 신라본기로 잘못 편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래에는 축조 기법이 마한 분구묘와 유사한 점을 들어 백제가 아니라 마한이 축조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최완규, 178~185).
    발굴조사 결과를 참조하면, 초축 당시 벽골제의 길이는 현존 벽골제와 비슷하지만 높이는 훨씬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대 현존 높이로 증축되었고, 5개의 수문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김주성, 277~281).
    벽골제의 기능은 초축 당시에는 방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저수지의 기능을 겸했다고 추정된다. 다만 조선 태종대의 중수 이후에는 주로 저수지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인다(김주성, 281~288).
    참고문헌
    尹武炳, 1976, 金堤 碧骨堤 發掘報告, 百濟硏究7
    洪思俊, 1978, 三國時代灌漑用池에 대하여-碧骨堤(金堤)碧骨池(唐津郡)-, 考古美術136·137
    이병도 역주, 1996,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최완규, 2013, 김제 벽골제와 백제 중방성, 湖南考古學報44
    김주성, 2015, 벽골제의 축조와 변화, 韓國古代史探究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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