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AD 230~247) 1년 : 기원후 230년
▶ 조분이사금이 즉위하다 : 230년 03월(음)
- 助賁尼師今立 一云諸貴.. 姓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骨正 一作忽爭.葛文王, 母金氏玉帽夫人, 仇道葛文王之女. 妃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 遺言以壻助賁繼位. 王身長, 羙儀采[정덕본·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采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表로 되어 있다. 문맥상 表가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表를 따랐다.],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1]이 왕위에 올랐다. [어떤 글에서는 제귀(諸貴)라 하였다.] 성은 석씨로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2]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어떤 글에서는 홀쟁(忽爭)이라 하였다.] 갈문왕(葛文王)[3]이고, 어머니 김씨 옥모부인(玉帽夫人)[4]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5]의 딸이다. 왕비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6]은 나해왕(奈解王)[7]의 딸이다. 전왕[나해이사금]이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사위인 조분이 왕위를 이으라고 하였다. 왕은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사리에 맞고 결단력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공경하였다.
▶ 연충을 이찬에 임명하다 : 230년 (음)
- 元年, 拜連忠爲伊湌, 委軍國事.
- 원년(230)에 연충(連忠)[8]을 이찬(伊湌)[9]에 임명하여 군사와 국정을 담당하게 하였다.[10]
▶ 시조묘에 가다 : 230년 07월(음)
- 秋七月, 謁始祖廟.
- 〔원년(230)〕 가을 7월에 〔왕이〕 시조묘(始祖廟)[11]에 찾아가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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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생몰년은 미상~247년이며, 230∼247년까지 재위한 신라 제11대 왕이다. 계보상 성은 석(昔)이나 이 당시 성을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다. 이 즉위년조 기사의 세주에 이름을 제귀(諸貴)라고도 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왕력제1의 제13대 미추이질금 세주에 제분왕(諸賁王)으로 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제귀는 오기라 판단된다.가족 관계를 보면 아버지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은 제9대 왕인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아들로, 조분은 벌휴의 장손이며, 전왕인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과는 사촌 관계가 된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이며, 배우자는 본서 즉위년조에 의하면 나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지만, 아들인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의 즉위년조에 나오는 모친은 나음갈문왕(奈音葛文王)의 딸 박씨로 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왕력제1에는 유례이사금의 어머니를 ▨소부인(▨召夫人)이라 하였다.형제로는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있고, 누이가 나해이사금의 왕후이다. 자녀로는 제14대 왕 유례이사금 및 제15대 왕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의 아버지 걸숙(乞淑), 석우로(昔于老)의 부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 제13대 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왕후 광명부인(光明夫人) 석씨가 있다.그의 재위 동안 감문국(甘文國)과 골벌국(骨伐國)이 복속되어 신라가 진한 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신라 제9대 왕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즉위년(184)조의 벌휴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 : 벌휴이사금의 장남 세신갈문왕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즉위년(196)조의 골정에 대한 주석 참조.
- 옥모부인(玉帽夫人) : 세신갈문왕의 배우자로 신라 제11대 왕 벌휴이사금과 제12대 왕 첨해이사금의 어머니가 된다. 부친은 구도갈문왕이다.
-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 : 아달라이사금대와 벌휴이사금대에 활동한 생몰년 미상의 인물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부친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19년(172) 정월조의 구도에 대한 주석 참조.
-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 조분이사금의 왕후로 여기에서는 나해이사금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즉위년(284)조에는 조분이사금의 장남인 유례이사금의 모친을 나음갈문왕(奈音葛文王)의 딸 박씨로 적고 있어 차이가 난다. 또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유례이사금의 어머니를 ▨소부인(▨召夫人)이라 하여 또 다르다. 어느 것이 맞는지 분명하지 않다.
- 나해왕(奈解王) : 신라 제10대 왕 나해이사금으로, 왕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고친 것이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즉위년(196)조의 나해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 연충(連忠) : 이 기사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 이찬(伊湌) :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2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척찬에 대한 주석 참조.
- 군사와 국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 신라 초기에 제1, 2관등인 서불한(舒弗邯)·이벌찬(伊伐湌), 이찬(伊湌)의 임명 기사에 이렇게 군사와 국정운영을 맡겼다는 표현이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찬 등이 관직이 아니므로, 군사와 국정이 이찬 등의 고정적인 직무라 하기는 힘들고, 아직 관직과 관등이 분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직위의 역할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시조묘(始祖廟) : 신라에 있었던 사당으로, 국가 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3년(6) 정월조의 시조묘에 대한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