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3일 수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대 혁거세 거서간(BC 57 ~ AD 4) 38년 : 기원전 20년

 

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38년 기원전 20

 

▶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가다 기원전 20년 02

 

  • 三十八年春二月遣瓠公聘於馬韓馬韓王讓瓠公曰, “·卞二韓爲我屬囯比年不輸職𧴨[''의 이체자]事大之禮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天時和倉𢈔[''의 이체자]充實人民敬讓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 王憤欲殺之左右諌止乃許歸.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정덕본에는 으로 되어 있고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문맥상 이 옳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을 따랐다.]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夲倭人初以瓠繋腰度海而來故稱瓠公.
  • 38(B.C. 20) 봄 2월에 호공(瓠公)[1]으로 하여금 마한(馬韓)[2]을 방문하게 하였다마한왕이 호공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이거늘[3] 근래 직분에 맞는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진한(辰韓)의 유민[4]으로부터 변한과 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그러나 우리 왕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저로 하여금 교빙(交聘)을 하게 하셨으니 지나칠 정도로 예를 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대왕께서 불같이 노하셔서 군대로 겁박하시니 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다마한 왕이 분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좌우 신하가 못하게 하여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의 난리에 고통을 겪다가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5]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거처를 정하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졌다이런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망이 있게 된 것이다호공은 그 족성(族姓)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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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호공(瓠公) :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본 기사에서 전하듯이 혁거세거서간 대에는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오며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즉위조와 삼국유사』 권제기이제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탈해이사금 대에는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하며김씨의 시조인 알지(閼智)를 시림(始林)에서 발견한 것으로도 나온다.
    한편 기록에서 그의 활동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혁거세거서간 38(B.C. 20)이며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탈해이사금 9년이다삼국사기에서 제시하는 기년을 그대로 따를 경우이 두 시기는 각각 B.C. 20년과 서기 65년이 되어호공의 활동 기간이 최소 85년에 이르게 된다혁거세거서간 38년 당시 호공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탈해이사금 9년에는 그의 나이가 100살을 훌쩍 넘게 되는바호공의 활동 시기와 관련한 이 같은 문제점은 신라본기 초기 기사의 연대상의 모순 사례의 하나로 지적되었다(강종훈, 7). 이에 대해서는 호공을 특정 인물로 보지 않고 박씨족을 대표하는 존재의 이름으로 파악하면서 기년의 문제점을 수긍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나(李富五, 254~256張彰恩, 49~50), 같은 사서에서 좁은 시간 범위에 동일한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적극적인 근거는 미비하다.
    참고문헌
    李富五, 1999, 新羅初期 紀年問題에 대한 재고찰先史와 古代』 13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서울대출판부
    張彰恩, 2004,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新羅史學報』 1
  2. 마한(馬韓) : B.C. 2세기 무렵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의 서쪽지금의 경기충청전라 지방에 위치했던 소국들의 연맹체.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상황을 전해주는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따르면당시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하여 55개 전후의 소국들이 마한을 구성하고 있었고전체 호수는 10만에 이른다고 하였다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애초에 마한의 한 소국이었으며한강 유역에서 시작된 백제의 세력 확장에 밀려 마한 연맹체의 범위는 남쪽으로 계속 축소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일본서기』 신공황후 49(249) 3월조에 보이는 남만(南蠻침미다례(忱彌多禮정복 기사를 근거로오늘날의 영산강 유역과 전남 해안 일대에 잔존해 있던 마한 소국들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盧重國, 1988). 한편 백제본기에는 시조인 온조왕 27년에 해당하는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소멸시킨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이는데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백제본기온조왕 27(9) 4월조 참조.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3. 진한(辰韓)과 … 속국이거늘 삼국지』 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한()조에는 마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인 월지국(月支國목지국)’을 다스리던 진왕(辰王)’이 마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그 뒤를 이어 진·변한에 속한 소국 24개가 열거되었는데, “그 12개국은 진왕에게 속해 있다(其十二國屬辰王)”라는 본문 서술과 함께 주석으로 떠돌다 이주한 자들이기 때문에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明其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라는 위략(魏略)의 기사가 인용되어 있다본 기사는 그를 참고하여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판단된다.
  4. 진한(辰韓)의 유민 여기서의 진한의 유민은 혁거세 출현 이전에 경주 분지에 산재해 있던 6촌의 주민들을 가리킨다. ‘유민(遺民)’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신라의 건국과 함께 진한은 사라졌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데실제 사실과는 어긋나는후대 사관의 오해에 따른 와전(訛傳)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삼국사기 사료비판론여유당, 68~69).
  5. 중국 사람들이 … 많았는데 이 기사는 삼국지』 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이 진()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라고 하였다.”는 기사와 직접 연관된다.
  6. 본래 왜인으로 … 칭하였다 호공(瓠公)의 이름에서 는 우리말로는 이 된다이를 근거로호공은 박씨 족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新羅史學報』 1). 본 기사에서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라고 한 것은 후대인의 부회의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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