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38년 : 기원전 20년
▶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가다 : 기원전 20년 02월
-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𧴨['貢'의 이체자],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𢈔['庫'의 이체자]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諌止, 乃許歸.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정덕본에는 寖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寢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寖이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寖을 따랐다.]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夲倭人, 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
- 38년(B.C. 20) 봄 2월에 호공(瓠公)[1]으로 하여금 마한(馬韓)[2]을 방문하게 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이거늘[3] 근래 직분에 맞는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 진한(辰韓)의 유민[4]으로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왕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저로 하여금 교빙(交聘)을 하게 하셨으니 지나칠 정도로 예를 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왕께서 불같이 노하셔서 군대로 겁박하시니 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다. 마한 왕이 분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 신하가 못하게 하여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의 난리에 고통을 겪다가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5]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거처를 정하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졌다. 이런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망이 있게 된 것이다. 호공은 그 족성(族姓)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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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호공(瓠公) : 혁거세거서간 대부터 탈해이사금 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본 기사에서 전하듯이 혁거세거서간 대에는 마한으로 사신을 간 것으로 나오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즉위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탈해가 이사금이 되기 전에 탈해의 계책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탈취당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이사금 대에는 대보(大輔)로 임명되었다고 하며, 김씨의 시조인 알지(閼智)를 시림(始林)에서 발견한 것으로도 나온다.한편 기록에서 그의 활동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이며,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탈해이사금 9년이다. 『삼국사기』에서 제시하는 기년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이 두 시기는 각각 B.C. 20년과 서기 65년이 되어, 호공의 활동 기간이 최소 85년에 이르게 된다. 혁거세거서간 38년 당시 호공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탈해이사금 9년에는 그의 나이가 100살을 훌쩍 넘게 되는바, 호공의 활동 시기와 관련한 이 같은 문제점은 신라본기 초기 기사의 연대상의 모순 사례의 하나로 지적되었다(강종훈, 7쪽). 이에 대해서는 호공을 특정 인물로 보지 않고 박씨족을 대표하는 존재의 이름으로 파악하면서 기년의 문제점을 수긍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나(李富五, 254~256쪽; 張彰恩, 49~50쪽), 같은 사서에서 좁은 시간 범위에 동일한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적극적인 근거는 미비하다.〈참고문헌〉李富五, 1999, 「新羅初期 紀年問題에 대한 재고찰」, 『先史와 古代』 13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張彰恩, 2004,「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 『新羅史學報』 1
- 마한(馬韓) : B.C. 2세기 무렵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의 서쪽,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 지방에 위치했던 소국들의 연맹체.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상황을 전해주는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에 따르면, 당시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하여 55개 전후의 소국들이 마한을 구성하고 있었고, 전체 호수는 10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애초에 마한의 한 소국이었으며, 한강 유역에서 시작된 백제의 세력 확장에 밀려 마한 연맹체의 범위는 남쪽으로 계속 축소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9년(249) 3월조에 보이는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 정복 기사를 근거로, 오늘날의 영산강 유역과 전남 해안 일대에 잔존해 있던 마한 소국들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盧重國, 1988). 한편 백제본기에는 시조인 온조왕 27년에 해당하는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소멸시킨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27년(9) 4월조 참조.〈참고문헌〉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 진한(辰韓)과 … 속국이거늘 :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한(韓)조에는 마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인 ‘월지국(月支國: 목지국)’을 다스리던 ‘진왕(辰王)’이 마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진·변한에 속한 소국 24개가 열거되었는데, “그 12개국은 진왕에게 속해 있다(其十二國屬辰王)”라는 본문 서술과 함께 주석으로 “떠돌다 이주한 자들이기 때문에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라는 『위략(魏略)』의 기사가 인용되어 있다. 본 기사는 그를 참고하여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판단된다.
- 진한(辰韓)의 유민 : 여기서의 진한의 유민은 혁거세 출현 이전에 경주 분지에 산재해 있던 6촌의 주민들을 가리킨다. ‘유민(遺民)’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신라의 건국과 함께 진한은 사라졌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데, 실제 사실과는 어긋나는, 후대 사관의 오해에 따른 와전(訛傳)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68~69쪽).
- 중국 사람들이 … 많았는데 : 이 기사는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이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라고 하였다.”는 기사와 직접 연관된다.
- 본래 왜인으로 … 칭하였다 : 호공(瓠公)의 이름에서 ‘瓠’는 우리말로는 ‘박’이 된다. 이를 근거로, 호공은 박씨 족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집권과정」, 『新羅史學報』 1). 본 기사에서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라고 한 것은 후대인의 부회의 사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