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 금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9년 : 기원후 568년

 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29: 기원후 568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 568()

 

  • 二十九年, 改元大昌.
     
  • 29(568)에 연호를 태창(太昌)[1]으로 바꾸었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 56806()

 

  • 夏六月, 遣使於陳, 貢方物.
     
  • 29(568)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2]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 56810()

 

  •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 29(568)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3]를 설치하였다.[4]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5]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6]를 설치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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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태창(太昌) : 진흥왕 29(568)부터 571(진흥왕 32)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568년에 건립된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 태창원년세차무자(太昌元年歲次戊子)’라 한 것을 통해 태창이란 연호를 실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창이란 크게 번창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진흥왕이 진흥왕 12(551) 정월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대외팽창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왕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신라의 국세(國勢)가 크게 고양되자, 이에 태창이란 연호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2.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 진서(陳書)4 본기(本紀)4 폐제(廢帝) 광대(光大) 2(568)조에 이 해 가을 7월 무신(戊申)에 신라국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반면에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 광대(光大) 2년조에서는 이 해 6월에 신라국이 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본서의 찬자는 책부원귀에 전하는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본기에 서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남천주(南川州) :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한다. 이 기록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라고 하고, 진평왕 26(604) 가을 7월 기록에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진흥왕 29년 겨울 10월에 신주(新州)의 주치와 정군단(停軍團)의 주둔지를 북한산(한강 이북의 서울)에서 남천(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고, 진평왕 26년 가을 7월에 다시 신주의 주치와 정군단의 주둔지를 남천에서 북한산으로 옮겼음을 반영한 것이다. 참고로 진흥왕 29년에 정군단이 남천지역에 주둔하였음은 정군단의 사령관인 남천군주(南川軍主)가 진흥왕 29년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보이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본서 권4 신라본기제4 진평왕 40(618) 기록에 북한산주군주(北漢山主軍主) 변품(邊品)이 가잠성전투(椵岑城戰鬪)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므로, 진평왕 26년 가을 7월 이후 진평왕 40년 이전 사이에 신주의 주치와 정군단의 주둔지를 남천에서 북한산으로 옮겼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본서 권37 잡지제4 지리2 삭주조에 선덕왕(善德王) 6, 당나라 정관(貞關) 11(637)에 우수주(牛首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라고 전하는 기록과 이후의 기록에 신주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은 사실 등에 의거하여, 선덕왕 6(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고 본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40, 63~66). 선덕왕 6년 이후 태종무열왕 8(661)에 주치를 한산(북한산)에서 남천으로 옮기면서 남천주라고 불렀다가 문무왕 4(664)에 다시 주치를 남천에서 한산(북한산)으로 옮기면서 한산주라고 불렀다. 통일 이후에 주치를 북한산에서 남한산으로 옮겼는데, 이러면서 한강 이남의 서울과 광주시 일대를 망라하여 한산주(漢山州)라고 부르고,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은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불렀다. 경덕왕 16(757)에 한산주를 한주(漢州), 북한산군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4.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 본서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에 정군단(停軍團)을 설치하거나 폐한 사실이 주()를 설치하거나 폐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이해한 견해(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80~84)를 참조한다면, 본 기록은 정군단을 북한산(한강 이북의 서울)에서 남천으로 이치(移置)시킨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신주의 주치(州治) 역시 북한산에서 남천으로 옮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비열홀주(比列忽州) : 함경남도 안변(북한 강원도 안변)에 해당한다.
  6. 달홀주(達忽州) : 오늘날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에 해당한다.
  7.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 본서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에 정군단(停軍團)을 설치하거나 폐한 사실이 주()를 설치하거나 폐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이해한 견해(전덕재, 2018, 80~84)를 참조한다면, 본 기록은 정군단을 비열홀에서 달홀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진흥왕 29(568) 10월에 신라는 정군단의 주둔지를 북한산(한강 이북의 서울)에서 남천(경기도 이천시)으로, 비열홀(함남 안변)에서 달홀(강원도 고성)로 옮겼는데, 모두 전방에서 후방으로 정군단을 이치시킨 것이 특징이다. 종래에 552년에 동맹을 맺은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568년 무렵에 틈이 벌어지게 되자, 진흥왕이 더 이상의 영토확장을 접는 대신 이때까지 확보한 영토를 공고하게 수호하기 위해 정군단의 주둔지를 후방으로 이치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전덕재, 2015).
    〈참고문헌
    전덕재, 2014, 異斯夫家系政治的 位相, 史學硏究115
    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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