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16년 : 기원후 555년
▶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 555년 01월(음)
-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 16년(555) 봄 정월에 비사벌(比斯伐)[1]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2]
▶ 북한산에 순행하다 : 555년 10월(음)
-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3]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였다.
▶ 주·군의 세금을 면제하고 사면하다 : 555년 11월(음)
-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復一年租調, 曲赦除二罪皆原之.
- 〔16년(555)〕 11월에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교서를 내려, 지나온 주(州)·군(郡)의 1년 간 조(租)와 조(調)[4]를 면제해주고,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죄[二死][5]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라고 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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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비사벌(比斯伐) : 현재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화왕군조에 비자화(比自火),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비자벌(比子伐),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 비사벌(比思伐),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 3월조에 비자발(比自㶱)로 전한다. 경덕왕 16년(757)에 비자화군을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 완산은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에 해당한다. 진흥왕 16년(555)에 전주시는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는 표현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완산주는 비사벌주(比斯伐州)의 잘못으로 보기도 하나(정구복 외, 124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화왕군조에 진흥왕 16년(555)에 〔비자화에〕 주(州)를 설치하고 이름을 하주(下州)라고 불렀다고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상주(上州), 하주(下州)가 보이고,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년(553) 7월조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므로, 553년 이전에 신라 영토에 상주와 하주를 설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하주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에서 상주와 하주는 문무왕 5년(665)까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사벌은 하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진흥왕 16년에 비사벌주를 설치하였거나 하주를 설치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이 때문에 본서의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에 정군단(停軍團)을 설치하거나 폐한 사실이 주(州)를 설치하거나 폐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사실,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신문왕 5년(685)에 하주정(下州停)을 혁파하고 완산정(完山停)을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자벌정(하주정)이 완산정의 전신이었던 사실 등에 기초하여 8세기 전반 성덕왕 때에 진흥왕 16년 정월에 ‘하주(下州)의 치소(治所)인 비사벌에 왕경인 출신 군사를 중심으로 편성한 비사벌정(「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비자벌정(比子伐停)이라고 전함)을 설치한 사실’을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고 고쳐 기술하였고, 본서의 찬자가 이것을 그대로 신라본기에 인용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84~88쪽). 한편 누대 동안 비사벌을 중심으로 한 가야 사람들이 백제의 완산에 사민(徙民)되면서 그곳을 비사벌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겼고, 이러한 전통이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고 신라본기에 잘못 기술된 이유가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李康來). 한편 비사벌에 정군단을 설치하고, 그 사령관으로서 군주(軍主)를 파견함으로써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나오는 ‘사방군주(四方軍主)’가 갖추어졌는데, 이로부터 군주는 지방에 주둔한 정군단의 사령관이면서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新州) 및 동해안의 우추군(于抽郡: 경북 영덕군 영해면)·실지군(悉支郡: 강원도 삼척시)·하서아군(何西阿郡: 강원도 강릉시) 등을 행정적으로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1).〈참고문헌〉李康來, 1987 「百濟 「比斯伐」考」, 『崔永禧先生 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탐구당; 2011 『삼국사기 인식론』, 일지사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북한산(北漢山) :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에 해당하며, 북한성(北漢城) 또는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불렀다. 경덕왕 16년(757)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진흥왕은 진흥왕 29년(568)에 북한산을 순행하고, 오늘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라고 부른다(이하 「북한산비」). 현재 「북한산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한편 일부 학자는 본 기록을 주목하여 555년(진흥왕 26)에 「북한산비」를 건립하였다고 보기도 한다(盧鏞弼, 1~6쪽; 하일식, 171~172쪽). 그러나 본서 신라본기에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고 전하는 기록, 「북한산비」에 남천군주(南川軍主)가 전하는 사실, 이 비에 전하는 내부지(內夫智), 무력지(武力智) 등의 관등이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된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와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전하는 것과 동일한 점, ‘欲勞賴如有忠信精誠’이란 표현이 이들 비에 모두 보이는 사항 등을 두루 감안하건대, 북한산비는 진흥왕 29년(568)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金昌鎬, 1983; 2009, 232쪽; 한국고대사회연구소, 68~69쪽; 朴省炫, 154쪽).〈참고문헌〉金昌鎬, 1983, 「新羅中古 金石文의 人名表記(1)」, 『大丘史學』 22; 2009, 『삼국시대 금석문 연구』, 서경문화사 재수록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신라1·가야편)』, 駕洛事蹟開發硏究院盧鏞弼, 1996,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一潮閣하일식, 2006, 『신라집권관료제연구』, 혜안朴省炫, 2010, 「新羅의 據點城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과정」,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조(租)와 조(調) : 중국 왕조에서 조(租)는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을 세금으로 거두는 것을, 조(調)는 직물에 해당하는 베[布]와 비단[絹], 그리고 특산물을 세금으로 거두는 것을 이른다. 다만 여기서 조(租)와 조(調)는 백성들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두 가지 사형죄[二死] : 참수(斬首)와 교수형(絞首刑)으로 사형을 받은 죄 혹은 대역(大逆)과 모반죄(謀叛罪)에 의한 사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정구복 외, 53쪽), 공개형인 기시형(棄市刑)과 비공개형인 참형(斬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洪承佑), 국가 질서 위반과 살인 행위 관련 사형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한영화) 등이 있다.〈참고문헌〉洪承佑, 2004, 「新羅律의 基本性格 - 刑罰體系를 중심으로」, 『韓國史論』 50,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53쪽한영화, 2015, 「신라의 五逆과 통치이념」, 『사림』 53
-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 용서해주라고 하였다 : 본 기록의 원문에서 ‘곡사(曲赦)’라고 표현하였다. 사면의 대상이 전국에 걸치면 대사(大赦)라고 표현하고, 일부 지역에 국한되면 곡사라고 표현하는데, 진흥왕이 거쳐 지나온 주와 군의 죄수를 사면하였기 때문에 곡사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