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57) 1년 : 기원후 24년
▶ 유리이사금이 즉위하다 : 24년 09월(음)
-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 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素有德望, 推譲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噬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1]이 왕이 되었다. 남해(南解)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2]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3]의 딸이다. 혹은 말하기를 왕비의 성은 박(朴)이고, 허루왕(許婁王)[4]의 딸이라고도 한다.처음 남해왕(南解王)이 세상을 떠나자 유리(儒理)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평소 덕망이 있어서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고자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성한 기물은 큰 보배라서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니,[5] 이에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왕으로 받들었고, 이사금(尼師今)[6]이라고 불렀다. 옛 전승이 이와 같은데, 김대문(金大問)[7]은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 남해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에게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 석 두 성씨는 나이가 많은 자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 후 김씨 성이 일어나서 세 성씨가 이빨이 많은 것으로써 서로 왕위를 이어갔으므로, 이사금이라고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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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 신라 제3대 왕.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첫 왕으로, 부친인 남해차차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과 기이제1 제3 노례왕(第三弩禮王)조에는 ‘노례니질금(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 등으로 표기되었다. 본서에서는 서기 24년에 왕위에 올라 57년까지 햇수로 34년간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경우, 왕력편에서는 ‘갑신년(甲申年)’ 즉 서기 24년에 즉위하여 33년을 다스린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재위 마지막 해를 다음 왕의 재위 기간에 포함시키는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기이편에서는 한(漢)의 유성공(劉聖公)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癸未年) 즉 서기 23년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 운제(雲弟) 부인 : 남해차차웅의 부인으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2 남해왕(第二南解王)조에서는 “어떤 데에는 ‘雲梯’라고도 되어 있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이 있는데, 가물 때 그 성모(聖母)에게 기도를 하면 들어준다.”라고 소개하였다. 생몰년 및 출신 가계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 : 유리이사금의 장인. 본서 권1 일성이사금 즉위조에서는 일성이사금을 유리왕의 맏아들이라고 전하면서, 일설로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는 전승을 덧붙여 기록하였다. 그의 딸 즉 유리이사금의 부인 이름은 본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일성니질금 즉 일성왕의 비(妃)를 일지 갈문왕의 딸 ‘□례부인(□禮夫人)’이라고 하여, 일지 갈문왕이 유리왕이 아니라 일성왕의 장인이었다는 다른 전승을 수록하였다. 갈문왕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일성이사금 15년(148)조의 주석 참조.
- 허루왕(許婁王) : 본 기사에서는 유리이사금의 부인인 ‘박씨’의 아버지로 전하는데, 뒤에 나오는 파사이사금 즉위조에는 파사이사금의 비(妃)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의 아버지로서, 허루 갈문왕이라고 나온다. 지마이사금 즉위조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는데, 파사이사금 당시 한기부(韓岐部)의 이찬(伊湌)이었다가 태자인 지마의 부인을 간택하는 과정에서 ‘주다(酒多)’ 즉 각간(角干)의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노례니질금 즉 유리이사금의 비(妃)를 ‘사요왕(辝要王)’의 딸 김씨로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辝要王’과 ‘許婁王’은 자형이 비슷한바, 필사 및 판각 과정에서 혼동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니 : 이는 ‘이사금(尼師今)’의 가운데 글자 ‘師’가 사이시옷(ㅅ)으로 앞글자의 종성에 해당함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표기례인 ‘이질금(尼叱今)’에서의 ‘叱’ 또한 사이시옷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대표적인 글자이다. 결국 이사금이나 이질금은 신라 당시의 발음으로는 ‘잇금’이 되는 것으로, 본 기사에서 유리와 탈해가 떡을 깨물어 ‘잇금’이 많은 자를 남해왕의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말 잇금이 한자로는 치리(齒理)로 표기될 수 있음에 착안하여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라고 할 수 있다.
- 이사금(尼師今) : 거서간, 차차웅을 이어 신라 초기에 쓰인 고유 왕호. 『삼국유사』에서는 ‘이질금(尼叱今)’ 또는 ‘치질금(齒叱今)’(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으로 표기되었다. 이사금이나 이질금, 치질금은 모두 우리말 ‘잇금’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파악된다. 그 의미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본서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역사가 김대문(金大問)의 해석을 받아들여 ‘연장자’를 뜻한다고 보았다. 이와는 달리 ‘잇’이 ‘잇다’, ‘계승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보아 사왕(嗣王) 내지 후계왕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李丙燾, 1976), 몇 개 부족이 연합하여 성립한 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哲埈, 1975). 한편 이사금은 본서에서는 제3대 유리부터 제18대 실성까지 사용된 왕호로 나오지만,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제3대 노례(弩禮: 유리)부터 제16대 걸해(乞解: 흘해)까지 사용된 것으로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참고문헌〉金哲埈, 1975,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 김대문(金大問) : 신라 중대의 역사가. 진골 출신으로, 성덕왕 대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주요 저술로는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삼국사기』가 편찬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본 기사에 보이는 이사금에 대한 김대문의 설명은 『계림잡전』에서 인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基白, 1978,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