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AD 4~24) 11년 : 기원후 14년
▶ 왜병과 낙랑이 연이어 침입하다 : 14년 (음)
-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内虚, 求[정덕본에는 求로 되어 있고,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來로 되어 있다. 문맥상 來가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來를 따랐다.]攻金城甚急. 夜有流星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 11년(14)에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6부(六部)[1]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이들을 막게 하였다. 낙랑(樂浪)[2]이 〔우리〕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金城)[3]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閼川)[4]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6부(六部)[5]의 병사 1,000명이 그들을 추격하여 토함산(吐含山)[6]의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렀는데, 돌무지를 보고 적들의 숫자가 많음을 알고서 추격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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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6부(六部) : 여기서의 6부는 앞서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에 ‘진한 6부’로 표현된 경주 지역의 6촌을 가리킨다. 6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 기사의 주석 참조.
- 낙랑(樂浪) : 한(漢)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중국의 변군(邊郡).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 28)조 기사의 주석 참조.
- 금성(金城) : 신라 초기의 왕성.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 37)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알천(閼川) : 경주 시내를 흐르는 하천으로, 지금 경주시의 보문호수 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서천)으로 합류하는 북천(北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서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즉위년(785)조에 ‘京北二十里’에 집이 있던 김주원이 ‘閼川’의 물이 불어 궁궐로 들어오지 못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원성대왕조에는 원성왕이 즉위 전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천의 물이 불어 집이 그 북쪽에 있던 김주원이 건널 수 없었다고 나와 ‘알천’과 ‘북천’이 같은 하천임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숙종 33년(1707)에 새겨진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가 경주시 동천동의 북천 북안에 남아 있어 현재의 북천이 오랜 기간 알천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 6부(六部) : 상고기에 신라 국가를 구성했던 6개의 정치체. 그렇지만 본 기사에서 전하는 시기에 6부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의 주석 참조.
- 토함산(吐含山) : 경주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토함산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3년(59) 3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